일본의 수도 도쿄에 있는 야스쿠니 신사 본당. 야스쿠니(靖國)는 ‘나라를 편안하게 한다’는 뜻이다.

일본의 수도 도쿄에 있는 야스쿠니 신사 본당. 야스쿠니(靖國)는 ‘나라를 편안하게 한다’는 뜻이다.

‘가미카제’로 투입된 조선청년들

이번 호에는, 해방 직전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우리 민족 청년 몇 사람을 소개하겠습니다. 이 청년들의 삶과 죽음을 들여다보면 해방 직전 우리 민족이 얼마나 비참한 상황에 처했는지 분명하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소개하려는 청년은 일본의 가미카제 특공대 소속 조선인 병사들입니다. 이 청년 대부분은 일본으로 유학 갔다가 전쟁이 나자 학도병으로 전쟁터에 강제로 끌려간 사람들입니다.

일본이 본격적으로 ‘가미카제’라는 이름을 붙여 특공대를 만든 것은 1944년 10월 무렵이었습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비행기나 잠수함에 폭탄을 싣고 가 적에게 부딪히거나, 돌아갈 시간적 여유가 없을 만큼 적에게 가까이 다가가 공격하다가 자신도 함께 폭사했던 일본의 특수부대를 통틀어 ‘가미카제 특공대’라고 하지요. 진주만 공습 때도 일본 전투기 몇 십대는 미국 군인들이 아군의 훈련 비행으로 착각할 정도로 낮게 비행하며 폭탄을 떨어뜨렸습니다. 물론 그 비행기들은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가미카제[神風]의 원래 뜻은 ‘신의 바람’입니다. 이 이름이 만들어진 것은 13세기였습니다. 몽골과 고려의 연합군은 일본을 침략하려다 태풍이 불어 두 차례나 실패했지요. 그때 일본 사람들은 자신들을 구해준 태풍에 ‘신의 바람’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일본은 전쟁이 끝나갈 무렵 다급한 마음에 가미카제 특공대를 만들었습니다. 6개월 안에 비축해 둔 연료가 다 떨어질 것을 예상한 일본은 빨리 전쟁을 끝내야 했지요. 그래서 군인들에게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 것을 요구했습니다. 또 적진까지 갈 연료만 주고 돌아올 연료는 채워주지 않았습니다.

가미카제 특공대 중 가장 나이가 어린 조선인 병사는 열일곱 살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 청년은 가족과 친구들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기고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났습니다. “우리는 미군기가 실린 적군 함대에 돌격하여 그들을 가루 내어 보여드리겠습니다. …… 야스쿠니에서 만나자, 전우들이여, 안녕.”

야스쿠니 참배는 ‘무반성’ 의미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을 위해 전쟁터에서 죽은 사람들을 제사 지내는 곳입니다. 제사 지내는 곳에서 만나자 하였으니 자신이 죽으러 간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었던 것이지요.

야스쿠니 신사의 제사 대상에는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전쟁 범죄자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일본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에 가서 참배하는 것을 우리나라를 비롯한 주변 나라들이 염려하는 것입니다. 수백만명을 죽음과 고통에 몰아넣은 전쟁 범죄자들에게 참배한다는 것을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지 않는다는 뜻이니까요.

앞의 유언을 남긴 청년의 유족은 참배 대상에서 청년의 이름을 빼달라고 야스쿠니 신사에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야스쿠니에서 만나자”라는 유언이 청년의 뜻이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17세 청년이, 아니 소년이 진심으로 일본을 위해 죽고 싶었을까요? 또 정말 죽어서 야스쿠니 신사에 남고 싶었을까요?

이번 호에 소개할 또 다른 청년들은 항일 운동을 하다 붙잡혀 감옥에서 세상을 떠난 윤동주와 송몽규입니다. 윤동주와 그의 동갑내기 고종사촌 송몽규는 시인이며 독립운동가입니다. 일본의 민족 말살 정책이 최고조에 달해 창씨개명을 강요하고 우리말과 글을 못 쓰게 하던 때, 심한 검열로 원고들이 삭제되기도 했지만 두 청년은 굴하지 않고 열심히 시를 썼습니다.

1941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이들은 일본 유학을 결심했습니다. 두 청년은 반일 의식이 투철했지만 학업을 계속하지 못하면 일본의 전쟁에 끌려가야 했으므로 어쩔 수 없이 유학을 택했습니다. 그들은 유학을 가기 위해 창씨개명을 했습니다. 이때의 부끄러운 심정을 윤동주는 ‘참회록’이라는 시로 남겼지요.

나라 잃으면 끝이다
윤동주 시인의 언덕. 연희전문학교 재학 시절 종로구 누상동에서 하숙하던 윤동주는 인왕산 자락에 자주 올랐다고 한다.

윤동주 시인의 언덕. 연희전문학교 재학 시절 종로구 누상동에서 하숙하던 윤동주는 인왕산 자락에 자주 올랐다고 한다.

평소 민족의 현실과 독립에 대해 자주 토론을 나누던 윤동주와 송몽규는 일본 경찰의 감시 대상이 되었습니다. 하숙집을 감시하며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던 경찰은 윤동주와 송몽규를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하였습니다. 1944년 2월 두 사람 모두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일본의 후쿠오카 형무소에 갇혔습니다.

그로부터 1년 후 1945년 2월16일과 3월7일, 윤동주와 송몽규는 29세의 나이로 옥중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습니다. 송몽규는 감옥에 갇힌 후 매일 밤 의문의 주사를 맞았다고 친척들에게 말했습니다. 이로써 두 청년이 생체 실험을 당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일기도 했습니다. 송몽규의 아버지는 후쿠오카 화장터에서 아들의 시신을 화장한 뒤 뼈를 빻을 때 뼛가루가 튀자 주변의 흙을 모조리 쓸어 담으며 이렇게 말했답니다. “내가 왜 내 아들의 뼛가루 한 점이라도 원수의 땅에 남기겠느냐.”

가미카제 특공대원이던 청년들과 항일 운동을 한 두 청년, 이들이 걸었던 길은 많이 달라 보입니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는 확실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인생의 꽃을 채 피우지도 못하고 젊은 나이에 처참하게 목숨을 잃었다는 점입니다. 그들이 그런 슬픈 운명을 맞이한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나라를 잃어버린 민족이었기 때문입니다.

글 =황인희 / 사진 =윤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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