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은구 기자 egka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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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는 어머니가 신기했다. 뚝딱 엿을 고는 것이나 뒤돌아서면 금세 산자를 만들어내는 것이 그랬다. 장독대에 갈 때면 고사리 같은 손으로 어머니 치마폭을 꼭 붙들고 따라다녔다. 가족을 위해 밥상을 차릴 때면 부뚜막에 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 모습을 바라봤다. 하루 종일 어머니를 보면서 “어머니처럼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개성의 한 작은 마을에 살던 소녀는 그렇게 꿈을 키워갔다.

◆20년간 한식전통음식연구소 운영

소녀의 이름은 윤숙자(68). 60여년이 지나 그는 ‘한식의 명인(名人)’ ‘한식의 대가(大家)’가 됐다. 지난 7일 그는 한식 세계화를 이끄는 한식재단 이사장에 취임했다. 윤 이사장은 20년 가까이 사재를 털어 한국전통음식연구소를 운영해왔다. 창경궁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연구소 옥상에서 그를 만났다.

하얀 얼굴에 고운 한복을 입었어도 손은 거칠었다. 왼손 검지에는 칼에 베인 자국이 있었다. 무슨 상처냐고 묻자 “어릴 적 어머니가 칼질할 때 손을 넣었다가 생긴 거예요. 지금도 일하다 힘들 때면 이 흉터를 봐요. 제게 비타민 같은 역할을 해줍니다”고 답했다.

윤 이사장은 최근 홍콩, 베트남 등 해외 유명 TV 방송에서 찾아와 한식을 취재해 간 일에 무척 고무된 모습이었다. 그들에게 호박케이크를 선보였다고 했다. 한식을 세계화하기 위한 정부의 노력과 동남아시아, 중화권 등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는 한국 드라마 등의 덕을 보고 있다고 했다.

사진 촬영 후 자리에 앉아 물을 한 모금 마신 그는 한식재단 이사장에 취임한 소감과 평생 한식만을 붙들고 살아온 ‘소명(召命)’에 대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프랑스 유명 셰프들도 고추장 활용

윤 이사장은 한식이 재료와 조리법이 특수해 세계화하기 어렵다는 세간의 지적에 대해 “뭘 모르는 소리”라고 잘라 말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 급식전문위원,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식음료전문위원을 맡아 정부와 일하면서 해외 탐방 기회가 많았다는 그는 직접 눈으로 한식의 가능성을 확인했다고 했다. 대통령 소속 문화융성위원회 위원이기도 한 그는 ‘미식의 나라’ 프랑스 이야기부터 먼저 들려줬다.

“이미 프랑스 유명 셰프들이 고추장 소스를 활용한 요리를 내놓고 있고, 사람들은 이들 음식에 열광합니다. 비빔밥은 해외에서 현지화된 요리로 변하고 있고요. 이를 어떻게 표준화하느냐가 문제지 한식의 특수성은 걸림돌이 아닙니다. 프랑스 파리에 뛰어난 맛의 한식집이 있는데 그 집엔 조리장이 없어요. 대신 표준화된 레시피가 있었기 때문에 제가 맛있다고 느꼈던 거예요. 한식이 훌륭한데도 세계에서 일본, 베트남, 태국 음식에 밀리고 있는 것은 이들과 달리 조리법을 보편화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윤 이사장의 이 같은 고민은 2011년 아름다운 한국음식 100선이란 책을 써서 한국어 영어 일어 중국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아랍어 체코어판 등 총 8개 국어로 출간할 때부터 시작됐다. 2007년 농림부(현 농림축산식품부)와 업무협약을 맺고 집필을 시작한 그는 한식이 가치에 비해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이유를 ‘표준화 부실’로 봤다. 하나의 좋은 맛을 찾았다는 전제 아래 프랑스에서 먹는 비빔밥과 미국에서 먹는 비빔밥의 맛이 같다면 한식이 더 많이 알려질 수 있다고 믿었다. 윤 이사장에게 표준화는 획일화가 아니라 최고의 맛을 지키는 일관성이다.

그가 집중한 또 다른 과제는 음식 자체가 아니라 음식문화를 살리는 일이었다. 한식은 반찬 수가 다른 나라 음식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은 데다 조리법도 다양해 깊게 음미할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다. 제철 재료를 활용하면 풍미는 더해진다. 이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문화 콘텐츠가 된다는 게 윤 이사장의 생각이다. 하지만 밥을 중심으로 하는 반상(飯床) 문화는 때에 따라 3첩 5첩 7첩 등으로 나오기 때문에 반찬을 하나하나 즐기기 어렵다. 한상차림보다는 반찬 각각을 즐길 수 있도록 코스로 내는 방안을 고민해봐야 한다는 게 윤 이사장의 생각이다.

◆음식뿐 아니라 문화를 알리는 게 중요

“박근혜 대통령께선 어딜 가나 ‘음식은 문화 그 자체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신다는데 저도 이 말에 깊게 공감합니다. 한식을 세계인이 맛있게 먹는 음식을 넘어서 세계인이 즐길 수 있는 문화로 키우고 알려야 합니다. 음식을 담는 그릇도 우리 문화 아닙니까. 질그릇이든 유기그릇이든지요. 외국인들은 그릇 하나, 반찬 하나, 식탁보 문양 하나까지 모두 궁금해하고 알고 싶어합니다. 반찬은 어떤 재료에 무슨 소스가 들어갔고, 왜 이런 식탁보를 깔았는지 등이요. 서빙하는 분이 ‘드세요’ 하고 가버리면 그냥 음식에 그칠 뿐 문화로 발전하지 못하죠.”

윤 이사장에게 상차림은 곧 배려다. 그릇부터 그곳에 담긴 내용물까지 차린 사람의 마음이 깃든다고 믿는다. 나이를 고려해 입에 들어갈 음식의 크기와 질긴 정도를 결정한다. 그의 철학은 확고하다. 그가 가장 공들이는 식탁은 대통령도, 장관도, 해외에서 방한하는 유명인사들의 것도 아니다. 가족을 위한 식탁이다. “우리 식구가 어떤 걸 좋아하는지 고민하고 연구합니다. 그곳에 답이 다 있어요. 그릇에 밥을 뜨고, 반찬을 담는 순간부터 남편과의 대화가 시작되는 거예요.” 코스닥 상장사 대주주였던 남편은 초기 전통음식연구소 운영이 어려울 때 회사를 팔아 빚을 갚아줬을 정도로 든든한 후원자다.

◆제철 재료 음식이 보약

문득 윤 이사장의 평소 상차림이 궁금해졌다. “저는 콩 요리를 내요. 밥에도 콩을 넣고, 국도 심심한 된장국을 즐기고요. 두부조림에 콩장도요. 여기에 나물, 생선 한 토막, 김이면 소박하지만 좋은 식단이라고 생각합니다. 콩은 단백질이 풍부한 대표적인 음식이고 면역력 생성도 도와줍니다. 최근에는 봄나물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한식이 왜 좋은가 하면 우리나라는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이 있잖아요. 그때마다 나오는 식재료가 있어요. 제철 재료는 먹는 게 곧 약입니다.”

‘한식 명인’쯤 되면 임금님 상에나 오른다는 12첩 반상을 얘기할 줄 알았는데, 단출하면서도 때에 맞는 식재료를 입에 올린 그는 전형적인 ‘개성댁’이었다. 고려시대에는 개성음식이 곧 궁중음식이었다. 전통적이면서도 보수적인 메뉴 선택을 즐기는 습성은 개성에서 나고 자란 영향을 받은 것 같다고 윤 이사장은 말했다.

배화여대 등에서 20년 가까이 학생을 가르쳤고, 이후 한국전통음식연구소에서 1000여명이 넘는 제자를 길러냈지만 그의 꿈은 여전히 ‘한식문화에 대한 소양을 갖춘 훌륭한 조리사’를 키우는 일이다. 그의 제자 중에는 이미 전통음식 명인도 다수 배출됐다. 독일 인도네시아 뉴질랜드 대사관저에 제자들을 보내 대사 부부와 함께 생활하며 한식을 알리는 작업도 하고 있다. “한식을 가르치는 전문학교가 한국엔 없어요. 조리학과가 전부입니다. 발효음식학과 궁중음식학과 사찰음식학과 차음료학과 등 세부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교육 프로그램이 마련돼야 합니다. 기술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한식 문화를 이해하는 소양을 제대로 가르쳐야죠.”

요즘엔 전통주에도 관심이 많다고 했다. 지난 2월 정부가 소규모 주류제조면허 대상에 탁주 약주 청주를 추가해 일반 음식점에서도 집에서 직접 담근 전통주를 제조·판매할 수 있게 했는데 이를 적극 활용해야 한다는 게 윤 이사장의 생각이다. “이젠 1kL 이상 5kL 미만 저장용기를 보유하면 소규모 주류제조면허를 받을 수 있는데 지역 한식당에서 이를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정부에 건의할 계획입니다. 술만큼 음식과 큰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것도 없습니다. 선물로도 술은 최고의 상품이 될 수 있고요.”

한식재단은 2010년 설립…관광산업 연계 브랜드화 '과제'

[人사이드 人터뷰] '한식의 대가' 윤숙자 한식재단 이사장, 이번엔 '한식 세계화 전도사'로…
한식재단은 이명박 정부 시절 우리나라 음식과 식문화 확산을 목적으로 조리의 과학화, 식재료 연구 등을 추진하기 위해 2010년 설립됐다. 정운천 전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이 초대 이사장을 지냈다.

‘한식이 곧 우리 민족의 얼이다’는 슬로건으로 해외 각지에 흩어져 있는 한식 표준화 작업, 해외 한식당 경영 컨설팅 지원, 조리인력 교육 등 식문화의 질적 향상을 위한 일을 한다.

세계 식품시장은 정보기술(IT), 자동차, 철강시장보다 규모가 크다. 시장조사기관 데이터모니터에 따르면 올해 세계 식품시장 규모는 6조달러(약 6850조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는 IT나 자동차시장의 세 배가량에 해당한다.

출범 이후 5년간 기록물 작업과 해외시장 개척에 주력한 한식재단은 올해부터 한식문화를 관광산업과 연계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드라마, 애니메이션 등을 제작해 한식문화 자체를 브랜드화하는 데 공을 들이고 있다. 한식재단은 글로벌 시장에서 한식이 일본, 태국, 베트남 음식 등에 고전하는 이유를 표준화가 안 됐기 때문이라고 보고 한식 현황 파악부터 메뉴 개발 및 홍보까지 글로벌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겠다는 계획이다.

4대 이사장으로 취임한 윤숙자 이사장은 “임기 3년 동안 한식 진흥과 음식관광 활성화사업을 위한 비전을 세워 세계인이 즐기고 공유하는 한식문화를 만들어 가겠다”고 말했다.

노정동 기자 dong2@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