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문찬 기자 sweat@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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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국내 한 대형백화점 직원이 부산 해운대에 있는 좌동재래시장을 방문했다. 창업 컨설팅 강연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의 직업은 백화점 제품 전시를 책임지는 비주얼머천다이저였다. 시장을 찾은 그는 깜짝 놀랐다. 제품 진열대가 그야말로 엉망이었기 때문이다. 직업 정신이 발동했다. 즉석에서 과일가게 홍시 진열대를 손봤다. 붉은색 홍시 밑에 보색인 녹색 비닐봉지를 깔았다. 먹음직스러워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하면 바로 포장할 수 있어 홍시가 잘 터지지 않겠다는 생각도 했다. 두 달 뒤 가게 주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들뜬 목소리였다. “트럭을 바꿨어요. 덕분에 매출이 다섯 배 뛰었거든요.” 한 통의 전화는 그의 운명을 바꿔놨다. 백화점 직원이 전통시장으로 눈을 돌리게 된 것이다. 이랑주 한국VMD(비주얼머천다이징·사진)협동조합 이사장의 이야기다.

○‘전통시장 바꾸기’에 뛰어들다

국내 최초 VMD 박사. 백화점 명품관부터 전통시장까지 죽어가는 곳도 살리는 ‘미다스의 손’. 이씨에게 붙은 수식어다. 그는 1993년부터 13년간 현대백화점과 롯데백화점, 이랜드 등에서 근무했다. ‘어떻게 보이느냐’가 사고 싶은 심리를 자극한다는 것을 깨닫고 VMD 분야를 개척했다. 2006년 이랑주VMD연구소를 설립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전국 곳곳의 전통시장은 물론 교보문고 LG전자 하이마트 풀무원 총각네야채가게 등이 그의 도움을 받았다. 지금은 한국VMD협동조합 이사장직도 겸해서 맡아 청년 창업을 돕고 있다.

서울 용산구에 있는 청년창업플러스센터에서 이씨를 만났다. 특이한 이력에 대해 묻자 환한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좌동시장 과일가게 사장님 전화를 받자마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회사에 있을 게 아니라 나만의 재능으로 전통시장 상인을 돕자. 좀 엉뚱했죠.” 이랑주VMD연구소 창업 초기엔 사무실도 없었다. 집 거실에 전화기 한 대를 놓고 시작했다. 손님도 없었다. “전국의 전통시장 상인이 몰려올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습니다. 소상공인들이 컨설팅비를 낼 만큼 돈에 여유가 없었던 거죠.”

○“좋은 것을 좋아 보이게 하는 일”

큰일이다 싶었던 그는 고향 친구를 찾아 포항으로 갔다. 전통시장에서 장사하는 친구였다. 친구의 도움을 받아 5~6개 매장을 바꿨다. 컨설팅받은 매장의 매출이 오르자 입소문이 났다. 기억에 남는 매장을 묻자 “조개 가게”라고 했다. “처음엔 조개를 그냥 바구니에 담아 팔았어요. 해감이 안 되는 데다 쉽게 죽었죠. 그래서 생각해낸 게 조개 수족관이에요. 전국 최초였습니다. 그런데 100% 해감은 안 됐어요. 조개도감을 뒤져보니 조개는 가장 편안할 때, 서식지 펄과 염도가 같을 때 100% 해감된다고 적혀 있더라고요. 지역별 바다의 염도를 확인한 뒤 염도계를 들고 가게로 갔습니다.” 이씨의 집요함 덕분에 조개 가게의 매출은 200배 올랐다. 펄이 하나도 없는 조개를 판매한다는 소문 덕분이었다.

이씨는 중소기업청에도 VMD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국가가 무료로 제공하는 소상공인 맞춤형 VMD 컨설팅을 제안해 사업을 시작했다. 컨설팅비를 낼 돈이 없는 소상공인을 돕기 위해 생각해낸 아이디어였다. 이전까지 전통시장 지원 프로젝트는 아치형 지붕을 짓는 것 정도에 불과했다.

작가이기도 한 그는 지난 11일 모든 업종을 섭렵하며 VMD 경험을 축적한 책을 펴냈다. 《좋아 보이는 것들의 비밀》이란 책이다. 그는 “23년간 비주얼머천다이저로 일하고 강의하면서 알게 된 노하우를 정리했다”며 “모든 상인이 컨설팅을 받지 않고도 알아서 잘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책을 썼다”고 했다. 이씨가 생각하는 ‘좋아 보이는 것의 비밀’은 무엇일까. “좋아 보이는 것은 겉모습만 치장한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좋다’는 감탄사가 저절로 나오도록 하는, 본질적으로 가치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저는 좋은 것을 더 좋아 보이게 하는 사람이지 좋지 않은 것을 좋아 보이게 하는 일은 하고 싶지도 않고, 할 수도 없어요.”

○세계 쇼핑몰 여행을 떠나다

[人사이드 人터뷰] 이랑주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책 보는 아이들 안쓰러워 교보에 새단장 제안했죠"
2012년 이씨는 훌쩍 세계 여행을 떠났다. “세계의 쇼핑몰이 보고 싶다”고 하자 남편은 흔쾌히 동행했다. 이랑주VMD연구소를 접고 동서대 겸임교수직도 내놨다. 선박 설계사인 남편은 회사를 그만뒀다. 달랑 배낭 하나씩 메고 1년간 인도 유럽 북미 남미 남극까지 40여개국을 돌았다. 누구나 찾는 관광지는 가지 않았다. 세계 150여개 백화점과 쇼핑몰, 전통시장, 서점 등을 둘러봤다. “제가 백화점을 너무 꼼꼼하게 둘러봐 종종 보안요원이 따라붙기도 했어요. 보안요원이 오는지 안 오는지 살피는 게 남편의 임무였죠.”

2013년 세계를 여행하고 돌아와 연구소를 다시 열고, 청년 창업 지원에도 나섰다. 규모가 작아 법인이 되기 힘든 업체를 모아 한국VMD협동조합을 꾸렸다. “세계를 돌아본 뒤 좌우명이 생겼어요. ‘마음에 사람을 품고 재능을 의미있는 곳에 쓰자.’ 그래서 시작한 의미있는 일이 협동조합입니다.” 조합엔 백화점 등에서 전시한 뒤 버려지는 전시물을 수거해 청년 창업자에게 기부하는 업체도 있다. ‘스타일 공유’다. 그는 “한 해에 백화점 등에서 버려지는 전시물이 3만t에 달한다”며 “집기 등을 버리지 말고 청년 창업가를 도와달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타인의 아픔을 들여다보는 눈”

비주얼머천다이저에게 가장 필요한 자질을 묻자 이씨는 “타인의 불편함과 아픔을 들여다보는 눈”이라고 말했다. 그가 진행한 교보문고 프로젝트가 대표적인 예다. 2014년 여름 교보문고 매장을 찾은 이씨는 차가운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컴컴한 불빛 아래서 책을 읽고 있는 아이들을 보자 마음이 짠했다. “다짜고짜 교보문고 기획실에 전화를 걸었어요. 저의 넓은 오지랖이 들썩인 거죠. 간단히 제 소개를 한 다음 책을 잘 진열해서 매출을 올릴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겠다고 했습니다.” 비슷한 고민에 빠져 있던 교보문고는 흔쾌히 강연 자리를 마련했다.

이씨는 강연에서 세계 일주를 하며 방문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 편안한 서점 등의 사진과 교보문고 사진을 함께 보여줬다. “교보문고는 책을 사랑하는 문화를 창조하는 공간이어야 한다”고 설득했다. 비교 전략은 적중했다. 강연이 끝난 뒤 교보문고는 태스크포스(TF)팀을 구성했다. 작년 말 새단장한 교보문고엔 100명이 앉아서 책을 읽을 수 있는 독서 테이블이 마련됐다. 조명은 책 읽기 편할 뿐 아니라 시력까지 보호하도록 설계했다. 이씨는 “교보문고 프로젝트가 지난 23년간 비주얼머천다이저로서 진행한 일 가운데 가장 보람있었다”고 했다.

■ 두 시간 넘게 쇼핑해도 지치지 않는다?
대형마트 ‘섬 진열’의 비밀을 아시나요


매장 들어서면 ‘1+1 기획’
여섯 걸음 걸으면 ‘오늘의 특가’…징검다리처럼 ‘섬’ 만들어 놔


맞벌이 부부들은 주말에 몰아서 장을 본다. 두 시간 정도 쇼핑하면서 걷는 거리는 평균 4㎞라고 한다. 이렇게 긴 거리를 걸으면서도 지치지 않는 것은 이른바 ‘섬 진열’ 때문이다. 대형마트는 넓은 통로 사이에 징검다리처럼 ‘보물섬’을 둔다. 처음 만나는 섬은 모든 소비자가 좋아하는 ‘원 플러스 원(1+1)’이다. 여섯 걸음쯤 더 걸으면 커피믹스를 ‘단 하루만 특가 행사’하는 섬이 나온다. 섬과 섬 사이를 걷다 보면 두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섬 진열은 치밀한 연구와 계산을 바탕으로 설계된 것이다. 예컨대 이마트엔 MSV(merchandising supervisor)라는 전담부서가 있다. 여기에 소속된 40여명은 소비자의 심리와 행동유형을 치밀하게 분석해 새로운 상품이 나올 때마다 효과적인 진열 방법을 연구한다. 비주얼머천다이저(visual merchandiser)들이다.

비주얼머천다이저는 백화점 대형마트 등 쇼핑몰의 제품 전시를 기획하는 스타일리스트다. 이들의 역할은 단순히 상품을 예쁘게 보이도록 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실적 등에 따라 상품 배치와 매장 분위기를 주기적으로 바꿔 브랜드 이미지를 구축한다. 상품 기획과 매입, 판매에도 관여한다.

비주얼머천다이저 가운데는 디자인 미술 패션 관련 전공자가 많다. 하지만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가장 중요한 자질로는 소비자를 설득하는 감각과 센스, 공간을 이해하고 활용하는 연출력이 꼽힌다. 매장과 본사 사이에서 중개자 역할을 하기 때문에 소통 능력도 필요하다. 비주얼머천다이저는 유망한 직업 가운데 하나다. 브랜드 이미지를 관리하는 비주얼머천다이저의 중요성을 깨닫는 업체가 점차 증가하는 추세여서다.

전설리 기자 slj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