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효성병원, 대구 대표 전문 산부인과…나눔의료 실천
1995년 박경동 대구효성병원장(사진)은 보건복지부 장관에게 한 통의 편지를 썼다. “동네의원과 대학병원 중간에서 환자를 책임질 전문병원 모델을 만들어보겠다”는 내용이었다. 대부분 병원이 내과 외과 산부인과 소아과 등 여러 과 환자를 함께 보던 시기였다. 박 원장은 산부인과 환자만 보는 전문병원을 세우고 싶었다. 하지만 병원 지을 돈이 없었다.

박 원장의 편지에 복지부가 화답했다. 서울에서 전문병원 필요성을 설명하는 브리핑을 열자고 했다. 당시 재정경제원에서 개원 자금 12억원을 빌려줬다. 포항과 대구에서 10여년간 산부인과 의원을 하며 모은 돈을 합쳐 1997년 3월15일 대구 수성구에 6층짜리 산부인과병원 문을 열었다. 개원 다음날 첫 수술을 했다.

산부인과 의사 5명으로 시작한 효성병원은 19년 뒤인 2016년 산부인과 의사 14명을 포함해 34명의 의사가 근무하는 병원이 됐다. 아동병원, 문화센터 등 병원 관련 건물만 6개로 늘었다. 박 원장은 효성병원을 “요람에서 무덤까지 여성 건강을 책임지는 병원”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환자들의 추억을 담은 따뜻한 병원이 되겠다”고 했다.

대구 효성병원은 산부인과 전문병원이다. 여성에 관한 모든 진료를 책임지고 있다. 박 원장은 전문병원에 대한 인식이 없던 시기에 전문병원을 세웠다. 미국과 일본 병원 등을 보며 벤치마킹했다. ‘안전한 진료’와 ‘친절한 서비스’ 두 가지를 원칙으로 삼고 병원을 지었다. 병원 특유의 소독 냄새를 없애고 간접조명을 달았다. 간호사 유니폼도 주문해 맞췄다. 주변에 아파트가 없고 교통도 불편했다. 하지만 한번 방문한 환자는 다시 병원을 찾았다. 이들이 다른 환자를 데리고 왔다. 개원 두 달 뒤엔 한 달에 100여명의 아이를 받을 정도로 환자가 늘었다.

환자에게 필요하다면 병원이 아니라 문화시설에도 투자했다. 개원 이듬해인 1998년 다문화가정 한글교실을 마련했다. 2000년엔 지역주민을 위한 3층짜리 교육센터를 지었다. 중소병원으로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박 원장은 “입덧 때문에 먹지 못해 뼈만 앙상해진 19세 베트남 산모를 진료했다”며 “시어머니에게 물어보니 ‘말이 안 통해 죽겠다’고 하더라”고 했다. 한글교실을 열고 한 달에 한 번 불국사 등으로 나들이도 나갔다. 그는 “교육센터가 환자, 지역사회에 봉사하고 즐기는 공간이 됐다”고 설명했다.

“아이들 진료를 위해 다른 병원을 가야 한다”는 산모 얘기를 듣고 아동병원을 지었다. 1년에 여섯 달이 적자일 정도로 아동병원 경영상태가 좋지 않다. 하지만 환자를 위해 운영하고 있다. 매년 고부 사진전, 조손 사진전, D라인(임신부) 사진전, 모유수유 사진전도 연다. 내년에는 20주년을 맞아 사진집을 낼 계획이다. 박 원장은 “병원은 추억의 장소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효성병원 의사는 대부분 이 병원에서 17~19년 근무했다. 첫애를 낳은 엄마가 둘째를 낳을 때도 같은 의사에게 맡길 수 있다. 근속연수가 긴 비결은 자긍심이다. 박 원장은 “전문의는 전문진료를 해야 보람을 느낀다”며 “이를 최대한 보장한다”고 강조했다.

그가 가장 보람을 느낀 순간은 1997년 9월 병원에서 처음 시험관 아기시술을 성공했을 때였다. 경험을 살려 난임치료 분야도 강화할 계획이다. 박 원장은 “내년 20주년을 맞아 노인을 위한 병원을 세울 것”이라고 했다. 그는 “태어나서 노인이 돼 죽을 때까지 모두 해결하는 병원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대구=이지현 기자 blues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