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계 대형 로펌인 클라이드&코의 브라이언 내시 싱가포르 법인장(왼쪽 세 번째)이 소속 변호사들과 회의하고 있다. 클라이드&코 제공
영국계 대형 로펌인 클라이드&코의 브라이언 내시 싱가포르 법인장(왼쪽 세 번째)이 소속 변호사들과 회의하고 있다. 클라이드&코 제공
세 개의 고층 빌딩 위에 거대한 범선이 놓인 마리나베이샌즈호텔 인근. 해안선을 따라 높다란 마천루가 하늘을 향해 뻗어 있는 싱가포르 중심지에 대부분 주요 로펌(법무법인)이 모여 있었다. 토종 로펌 라자&탄도 그중 하나다. “싱가포르가 아시아 국제중재 허브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은 법률시장 개방에 있습니다.” 아드리안 웡 변호사는 ‘법률시장 개방으로 싱가포르가 얻은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웡 변호사는 “잘 정비된 싱가포르의 법률제도와 글로벌 로펌의 선진 시스템이 시너지 효과를 내면서 중재에 적합한 환경이 조성됐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그에 따르면 일본, 네덜란드 기업도 싱가포르에 중재를 신청할 만큼 싱가포르가 아시아의 국제중재 중심지로 자리잡았다. 미국계 로펌과 싱가포르 로펌이 합작한 듀앤모리스 셀밤의 에듀어드 고메즈 대표변호사도 “시장 개방 이전에는 싱가포르 로펌들이 국제중재를 잘 취급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Law&Biz] '국제중재 허브' 싱가포르, 비결은 법률시장 개방
싱가포르는 통상협정과는 무관하게 정부 주도로 2000년 법률시장을 열었다. 법률시장을 개방해 금융서비스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다. 궁극적으론 글로벌 기업의 투자를 이끌어내는 게 목표다. 공식법무제휴(FLA:formal law alliance), 합작법률회사(JLV:joint law ventures), 외국 로펌이 허가받아 싱가포르 변호사를 고용하는 형태(QFLP:qualifying foreign law practice) 등 세 가지 제도를 도입했다. QFLP 자격은 앨런&오버리, 클리포드 챈스, 깁슨 던&크러어, 존스 데이, 레이텀&왓킨스, 링크레이터스, 노튼 로즈 풀브라이트, 시들리 오스틴, 허버트 스미스 프리힐즈 등 9곳이 갖고 있다. JLV는 100여곳이 넘는다. FLA는 이용하는 로펌이 거의 없다.

싱가포르의 법률시장 개방 정책은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한국 법무부도 싱가포르 모델을 참고했다. 싱가포르 법조계 인사들은 싱가포르의 점진적 개방에 성공의 열쇠가 있다고 의견을 모았다. 영국계 대형 로펌인 클라이드&코의 브라이언 내시 싱가포르 법인장은 “싱가포르는 FLA, JLV를 도입하고 8년 뒤에 QFLP 제도를 도입했을 만큼 점진적으로 시장을 열었다”며 “싱가포르 로펌과 글로벌 로펌이 파트너로서 함께 일할 기회를 주고 어느 정도 성공 사례가 나온 뒤 그다음 단계를 도입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듀앤모리스 셀밤의 셀밤 대표변호사는 “법률시장 개방이 소기 성과를 거둔 것은 QFLP 수를 제한하는 등 토종 로펌을 보호하는 장치를 마련한 게 주효했다”고 말했다. JLV와 FLA를 통해 글로벌 로펌과 싱가포르 로펌이 ‘상대방을 읽는 시간’을 준 것이다.

시장 개방 초기인 2000년대에는 서투른 ‘짝짓기’에 따른 아픔도 있었다. 미국계 로펌인 화이트&케이스와 싱가포르 콜린 응&파트너스가 설립한 JLV, 미국계 셔먼&스털링과 싱가포르 스탬퍼드가 신고한 JLV는 2년 만에 해체됐다. 영국계 로펌 프레시필드가 싱가포르 철수를 결정함에 따라 드류&네피어와 설립한 JLV는 2007년 청산됐다. 해체의 주된 원인으론 기업 문화 차이가 꼽힌다. 서로 주도권을 잡으려고 신경전을 벌였고, 글로벌 로펌과 지역 로펌 간 문화 차이가 소통의 부재를 불러왔다는 분석이다.

시행착오를 겪은 뒤 최근에는 비교적 안정적인 모양새다. 법률 전문지 체임버스&파트너스가 선정한 규모별 싱가포르 로펌 순위에서 토종 로펌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1위부터 10위까지 로펌 중 미국계인 베이커&매켄지, 웡&류를 제외하곤 모두 토종 로펌이다. 웡 변호사는 “일부 싱가포르 변호사가 고난도 사건을 경험해보고 싶어 외국 로펌을 선호하는 것은 맞지만 선임 파트너급 변호사는 여전히 로컬 로펌을 선호한다”고 말했다.

싱가포르=김인선 기자 indd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