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청 탐지업체 직원이 25일 서울 강남의 한 오피스텔에서 불법 주파수를 잡아내는 탐지기를 활용해 녹음기 등 도청 장치를 찾고 있다. 오형주 기자
도청 탐지업체 직원이 25일 서울 강남의 한 오피스텔에서 불법 주파수를 잡아내는 탐지기를 활용해 녹음기 등 도청 장치를 찾고 있다. 오형주 기자
중앙부처 고위 공무원인 A씨는 올 들어 부서 회의를 주재할 때마다 항상 스마트폰을 탁자 위에 올려둔다. 회의에서 나오는 발언을 녹음하기 위해서다. 직원들에게는 회의 시작 전 “오늘 회의 내용은 전부 녹음할 예정”이라고 미리 일러둔다. 그는 “부하 직원들을 못 믿는 건 아니지만 안건에 따라 나중에 법적으로 책임소재를 규명해야 할 때가 있다”며 “녹음을 하면 내뱉기 쉬운 막말 등을 억제하는 효과도 있다”고 설명했다.

녹취가 일상화되고 있다. 스마트폰 등 정보기술(IT)의 발전으로 누구나 쉽게 대화나 통화 내용을 녹음할 수 있게 돼서다. 녹취는 각종 법적 다툼을 대비하는 가장 편리한 증거 확보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관련 범죄가 늘어나는가 하면 속기사와 도청 탐지업체 등도 특수를 누린다.

유치원생부터 유력 정치인까지

[경찰팀 리포트] '녹취의 일상화'…현직 의원도 벌벌 떤다
녹취는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 아이를 보내는 학부모에게도 일상적 습관으로 자리 잡았다. 6세 딸아이를 둔 최모씨(35)는 매일 아침 유치원에 가는 아이 가방에 초소형 녹음기를 미리 넣어둔다. 최씨는 “요즘 어린이집 등에서 학대 사건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접할 때마다 가슴이 철렁한다”며 “폐쇄회로TV(CCTV)로 확인하기 어려운 폭언·욕설 등에 대비해 녹음하고 있다”고 말했다.

스마트폰의 녹음 기능을 활용해 통화 내용을 녹취로 남기는 사람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SK텔레콤의 스마트폰 통화 앱(응용프로그램) ‘T전화’에는 아예 모든 통화를 녹음할 수 있는 자동녹음 기능이 기본으로 탑재돼 있다. 이 서비스를 이용하는 직장인 박모씨(29)는 “거래처와의 통화 내용이 녹음된 과거 휴대폰도 모두 보관하고 있다”고 했다.

녹취 내용이 정치 쟁점이 되는 일도 흔해졌다. 지난 1월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를 만난 안철수 국민의당 공동대표의 수행비서가 두 사람 사이의 대화를 몰래 녹음해 논란이 됐다. “이 여사에게 ‘꼭 정권 교체를 이뤄달라’는 말을 들었다”는 안 대표의 주장을 이 여사가 반박하자 대화 내용이 담긴 녹취록이 공개된 것이다. 새누리당도 윤상현 의원이 이달 초 김무성 대표에게 막말을 한 통화 녹취록이 공개되면서 곤욕을 치렀다. 후폭풍으로 총선 공천에서 배제된 윤 의원은 “통화 내용을 녹음해 유출한 사람을 처벌해 달라”며 지난 18일 검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도청 탐지 등 관련 업계도 ‘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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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가 법적 다툼의 결정적인 증거로 이용되면서 이를 확보하기 위한 기술도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 지난해 4월 전북지방경찰청은 일명 ‘스파이앱’을 판매한 흥신소업자 조모씨(40)를 구속하고 해당 앱을 구매한 40명도 불구속 입건했다. 스마트폰에 전송된 인터넷 주소에 접속하면 자동으로 설치되는 것으로, 해당 스마트폰으로 통화하면 녹취파일이 다른 이에게 전송된다. 주로 배우자의 외도증거 확보를 원하는 고객들이 구매했다.

녹취가 늘면서 속기사도 각광받고 있다. 서울 서초동 법조타운 일대에는 녹음 파일을 듣고 문서로 풀어 녹취록을 만들어주는 속기사 사무실만 40여곳에 달한다. 수요가 늘면서 국가공인 한글속기 자격증 응시자도 2011년 4726명에서 2014년 8602명으로 두 배 가까이 증가했다.

원치 않는 녹취를 막기 위한 도청 탐지업체도 성업 중이다. 도청 탐지업체인 코리아리서치 박경도 본부장(46)은 “최근 도청 장치를 찾아달라는 의뢰 건수가 전년 대비 2배 이상 늘었다”고 했다. 정부가 지난해 ‘국가 정보보안 기본지침’을 통해 중앙부처 및 지방자치단체에 도청 탐지를 의무화하면서 이들 업체는 ‘특수’를 누리고 있다.

현행 통신비밀보호법상 타인 간 대화를 녹음하는 것은 불법이다. 몰래 녹음한 녹취록을 유포하는 행위도 처벌된다. 다만 통화 중 녹음과 같이 대화 당사자의 녹음은 상대방의 동의가 없어도 허용된다. 하지만 대화에 참여하지 않고 녹취를 했다면 불법이다. 2012년 최필립 전 정수장학회 이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던 한 언론사 기자는 통화가 종료되지 않은 상태에서 최 전 이사장과 방송사 임원 간 대화 내용을 녹음해 보도했다. 법원은 해당 기자가 대화에 참여하지 않고 녹음한 것을 문제 삼아 유죄 판결을 내렸다.

불법 녹취 사건은 갈수록 늘고 있다. 경찰청에 따르면 통신비밀보호법 위반으로 검찰에 송치한 사건 수가 2010년 100건에서 2014년 244건으로 두 배 이상 증가했다. 권태훈 서울 관악경찰서 사이버수사팀장은 “스파이앱이나 악성코드를 통한 녹음파일 등 유출 사건이 빈번하다”며 “주기적으로 녹음파일을 삭제하고 경찰청에서 배포하는 ‘폴-안티 스파이앱’ 등 보안 프로그램으로 검사하는 등 관리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오형주 기자 oh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