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승 전 신민당 대표 별세, 반공반탁·40대 기수론·중도통합론…정치 격랑 헤쳐온 '거목'
7선 국회의원을 지낸 소석(素石) 이철승 전 신민당 대표(헌정회 원로위원회 의장)가 지난 27일 오전 3시 향년 94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이 전 대표는 1955년 민주당 창당을 주도했고, 김영삼(YS)·김대중(DJ) 전 대통령과 ‘40대 기수론’을 내세우며 경쟁한 야권의 원로였다.

이 전 대표는 전주고와 고려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광복 직후인 1946년 반탁전국학생총연맹 중앙위원장과 전국학생총연맹 대표의장으로서 신탁통치 반대운동과 반공운동을 주도한 학생운동 1세대다. 정부 수립 과정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을 지지했으나 이 전 대통령이 친일파 출신 경찰을 내각에 기용하는 것에 반대해 야당 정치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54년 3대 총선 때 전북 전주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됐다. 이후 4·5·8·9·10·12대 국회의원에 당선돼 7선 의원을 지냈다. 1954년 대통령 중임 제한을 없애는 ‘사사오입 개헌’이 통과되자 단상에 뛰어올라 최순주 당시 국회 부의장의 멱살을 잡고 “이게 무슨 짓이냐”고 항의한 일화가 있다.

1955년 현 야권이 뿌리로 삼는 민주당 창당을 주도했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직후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1964년 돌아와 국회 부의장, 신민당 대표최고위원을 지내는 등 야당 핵심인사로 활약했다.
1978년 6월 이철승 전 대표가 당시 김영삼 신민당 전 총재와 국회 외무위에 나란히 앉아 있다. “외교·안보는 초당적으로 협력해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었던 이 전 대표는 지미 카터 미국 정부가 주한미군 철수 방침을 철회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연합뉴스
1978년 6월 이철승 전 대표가 당시 김영삼 신민당 전 총재와 국회 외무위에 나란히 앉아 있다. “외교·안보는 초당적으로 협력해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었던 이 전 대표는 지미 카터 미국 정부가 주한미군 철수 방침을 철회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연합뉴스
1970년엔 YS·DJ와 함께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섰다. 이 전 대표는 YS에게 양보하라는 유진산 당시 신민당 총재의 권고에 따라 중도에 경선을 포기했다. 그러나 YS가 1차 투표에서 과반 득표에 실패해 벌어진 결선 투표에선 DJ를 지지, DJ가 후보로 선출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76년 신민당 대표에 선출된 뒤 ‘국내정치는 서로 경쟁하되 정치적으로 협력할 것이 있다면 협력하고 외교·안보 문제는 초당적으로 협력해야 한다’는 중도통합론을 내세우다 ‘사쿠라 논쟁’에 휩싸이기도 했다. 정부·여당과 야합했다는 의미였다.

이 전 대표는 또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주한미군 철수를 추진하자 미국 상원의원, 일본 총리 등을 만나 주한미군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나라가 있어야 여당도 있고 야당도 있는 것 아니냐”며 “주한미군 철수는 북한의 적화통일 야욕에 말려드는 꼴”이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신군부 집권 후 정치규제를 당했다가 1985년 해금돼 12대 총선 전북 전주·완산에서 당선, 7선 의원이 됐다.

1988년 13대 총선에서 낙선한 뒤 정계에서 은퇴하고 자유민주총연맹 총재, 건국애국단체총연합회 회장, 자유민주민족회의 대표상임의장 등 보수 인사로 활동했다. 서울평화상문화재단 이사장 등으로 최근까지 활발하게 활동했으나 이달 중순 감기 증세로 입원한 뒤 건강이 급격히 나빠진 것으로 알려졌다.

타계 직전까지 북한 핵실험과 대북 제재 관련 기사를 읽었으며 ‘평양에 가서 냉면을 먹고, 평창 동계올림픽을 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다고 측근들은 전했다. 병세가 악화하자 주변에 “시국이 엄중한데 가족장으로 간소하게 치러달라”고 당부했으며 조의금과 조화도 일절 받지 않도록 했다고 헌정회 원로위원회 부의장인 정재호 전 의원이 말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창희 여사와 아들 이동우 전 호남대 교수, 딸 이양희 UN 미얀마인권보호관, 사위 김택기 전 의원이 있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17호실, 발인은 다음달 2일이며 장지는 국립서울현충원으로 결정됐다.

유승호 기자 ush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