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 위해 꼭 필요하지만, 농민 '극단 선택' 수단 되는 두 얼굴
사회공헌재단, 전북 농촌에 600개 설치…여는 동안 '진정' 기대


"'욱' 하는 마음 가라 앉히고 조금만 더 생각해보세요.그러면 저(농약)를 찾지 않을 겁니다."

농부의 어깨춤이 절로 나오는 황금 들녘의 풍년은 저절로 오지 않지요.

봄부터 가을까지 한순간도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는 농부의 거북등처럼 갈라진 손끝에서 풍년은 시작됩니다.

그렇다고 탐스런 벼 사이를 뚫고 불쑥불쑥 솟아오른 피(볏과의 한해살이 풀)를 다 뽑아낸다고 해서 일이 끝나는 것은 아니죠.
멸구·줄점팔랑나비·물바구니·혹명나방 등 벼에 붙어사는 병해충을 모조리 잡아야 그 해 농사의 풍년을 장담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부지런한 농부라도 모내기를 마친 늦은 봄 이후부터 농약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친환경농법으로 농사짓는 일부를 제외하면 대부분 농가에서는 한 톨의 쌀이라도 더 얻기 위해 독한 살충제들을 사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고독성 농약들이 '자식 같은 벼'를 갉아먹는 병해충만 잡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불행히도 농약은 인체에도 치명적입니다.

무색무취라는 특성 때문에 농작물 보호에는 효과적이지만 사람에게 해를 미칠 때도 똑같이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중에서도 원예용 방제 농약인 메소밀은 체중 1㎏당 치사량이 0.5∼50㎎인 고독성으로 분류됩니다.

기억해보세요.

최근 농촌 곳곳에서 발생해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끔찍한 사건들의 한가운데에 '농약'이 있었습니다.

수십년지기 이웃사촌을 살해하는 데 이 농약이 버젓이 사용된 것입니다.

사이다에, 만두에, 콩나물밥에, 두유에 섞인 고독성 농약이 여전히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묻지마 엽기사건'의 주범이 되는 상황인 셈이죠.
또 농촌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상당수도 격한 마음을 가누지 못하고 농약을 마십니다.

하지만 이처럼 끊임없이 인명 피해를 부르는 고독성 농약의 관리·감독은 여전히 농민 개개인의 몫으로 남아 있습니다.

정부는 고독성 농약을 판매할뿐 수거에는 '나 몰라라' 하며 뒷짐을 지고 있습니다.

쓰다 남은 농약은 논두렁 길섶에서도, 집 마당에서도, 장독대 뒤편에서도 버젓이 발견됩니다.

19일 생명보험 사회공헌재단이 전북도 농촌 마을에 이들 농약을 한 군데 넣어둘 수 있는 보관함 600여 개를 나눠줬습니다.

개당 30만원 남짓한 보관함을 만드는 데 총 2억원가량이 들었다고 합니다.

철로 만들어진 보관함은 열쇠가 있어야만 여닫을 수 있습니다.

'욱하는 마음'이 들더라도 열쇠를 찾는 데 얼마간의 시간을 들인다면 즉흥적인 마음이 다소 가라앉고 진정될 수 있는 효과를 위해 열쇠를 사용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단지 농약의 보관을 위해 보관함을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고 농민의 정신건강 상태를 파악하기 위해 전북도 역시 동네 이장과 부녀회장 등의 도움을 얻기로 했습니다.

우울증 등을 앓는 농민에 대한 관찰을 강화해 사전에 '극한 선택'을 막으려는 취지에서입니다.

전북도 관계자는 "고독성 농약을 회수하는 데 한계가 있는 만큼 보관함에 제대로 (농약을) 보관하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면서 "이 보관함이 한 사람의 인명피해라도 막을 수 있다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전주연합뉴스) 홍인철 기자 ichong@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