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망 단정했다가 "과학적 증거는 없다"로 급선회

수조원대 다단계 사기를 벌인 후 중국으로 도주한 조희팔(58)의 사망 여부를 놓고 경찰이 혼선을 빚고 있다.

사망을 뒷받침하는 물증이 없음에도 죽은 것으로 단정했다가 각종 의혹이 제기되자 생존 가능성에도 여지를 뒀다.

사망을 기정사실화했음에도 3년 이상 지명수배를 철회하지 않아 자기모순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경찰청 관계자는 13일 "조씨가 숨진 것으로 보이는 자료가 발견돼 사망 추정으로 발표했으나 조씨의 시신이나 DNA 등을 통해 사망 사실이 100% 확인되지 않아 지명수배를 유지했다"고 해명했다.

강신명 경찰청장도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조희팔이 사망했다고 볼만한 과학적 증거는 없다"고 말했다.

조씨가 2011년 12월 중국에서 급성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고 2012년 5월 21일 발표한 것과 배치하는 내용이다.

조씨의 은닉자금을 수사하던 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이하 지수대)가 당시 이런 발표를 했다.

지수대는 그해 5월 12일 은닉자금을 추적하기 위해 조씨 가족 등의 주거지를 압수수색하는 과정에서 조씨의 사망진단서, 시신화장증, 유족이 참관한 가운데 장례식을 치른 동영상을 발견했다.

이를 보고 조씨가 사망했는지를 인터폴을 통해 중국 공안에 요청, 16일 사망했다는 답신을 받았다.

경찰은 이를 근거로 '사망한 것을 확인했다'고 단정했다.

결정적인 증거가 없었음에도 생존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한 것이다.

지명수배 유지를 이유로 조씨의 사망이 '100% 확인되지 않았다', '과학적인 증거가 없다'고 했던 것과 상충하는 대목이다.

오락가락하는 행보는 검찰의 원점 재수사 방침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조씨의 사망을 발표하고서 사실상 수사를 접은 데 따른 비난 여론을 의식한 탓에 '말 바꾸기'를 했을 개연성이 큰 것이다.

강 청장은 2012년 사망을 발표했을 당시에 "현실적으로 조희팔이 사망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고 해명했으나 설득력이 약하다는 게 중론이다.

다른 경찰청 관계자도 "현장에서 조씨가 숨진 것을 봤다는 사람을 거짓말탐지기 조사한 결과 진실 반응이 나오는 등 당시 정황을 봤을 때 사망한 것을 확신한 것 같다"고 부연했다.

경찰은 거짓말탐지기의 한계를 누구보다 잘 안다는 점에서 이런 해명은 부적절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경찰은 시신을 직접 확인하거나 유전자 검사를 하지 못해 강 청장의 표현대로 죽음에 대한 '과학적 증거'는 없다.

경찰이 조씨의 사망 통보를 받았을 때 시신은 이미 화장돼 국내 모 공원묘지에 안치됐다.

조씨 가족들이 현재까지 사망신고를 하지 않은 것도 새로운 의문점이다.

죽음이 공식적으로 확인되면 사기 피해자들이 거세게 항의할 것이 두려워 사망신고를 하지 않았다고 가족 측이 설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2009년 6월 인터폴을 거쳐 조씨에 대한 적색수배령을 내렸다.

이런 국제공조 노력은 중국 측의 사망 통보에 무기력했다.

경찰은 뒤늦게 수사 가능성을 일부 열어놨다.

경찰청 관계자는 "조씨의 최측근인 강태용(54)씨가 송환돼 (조씨의 생존과) 관련한 진술을 하면 당연히 수사를 재개한다"고 말했다.

강씨는 '조희팔의 2인자'로 횡령금을 관리한 자금줄이자 수사기관에 금품로비를 한 것으로 지목된 인물이다.

중국 장쑤(江蘇)성 우시(無錫)에서 최근 검거돼 국내 송환을 기다리고 있다.

2012년 5월 조씨의 사망 발표는 청와대 문건 유출 혐의로 기소된 박관천(49) 당시 지수대장이 했다.

당시 수사국장은 김학배 전 치안감, 수사기획관은 황운하 현 서울지방경찰청 생활안전부장이었다.

강신명 경찰청장은 그해 5월 9일까지 수사국장으로 근무하다 정보국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서울연합뉴스) 구정모 기자 pseudojm@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