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생활의 오아시스' 여름휴가

휴가계획 둘러대던 최 대리, 알고보니 '이직 면접 투어'

심신 재충전 대신 '통장 충전'
휴가 안 가고 연차수당 쌓기

일정 꽉꽉 채워 떠난 해외여행
비행기 연착해 공항서 바로 출근
[金과장 & 李대리] 상사의 빈자리 효과…출근했는데 휴가 온 느낌

대기업에 근무하는 김 과장에게는 올 상반기에 많은 일이 벌어졌다. 회사가 대규모 명예퇴직을 시행하면서 몇 년을 함께 일한 동료들이 하루아침에 회사를 떠났다. 회사는 재무구조를 개선해야 한다며 남은 직원들을 강하게 몰아붙였다.

여기에 최고경영자(CEO)가 검찰 수사를 받는 일까지 벌어져 최근 1~2개월은 회사 전체가 뒤숭숭했다.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으로 사회 전체가 시끌시끌해 더 어수선했다.

‘내 생활이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 휴가 시즌이 돌아왔다. ‘어쨌든 휴가가 오긴 오는구나.’ 김 과장은 요즘 뒤늦게 아내와 머리를 맞대고 휴가일정을 짜고 있다. 해외로 나가는 비행기가 이미 꽉 차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내수경기 진작을 위한 국내여행에 동참하기로 했다. 1년 내내 여름휴가만 바라보고 고된 직장생활을 견디는 김과장 이대리들. 이번주 ‘김과장 이대리’에서는 여름휴가에 얽힌 직장인들의 에피소드를 모아봤다.

해외 휴가지에서 맞선을…

대기업 재무팀에서 일하는 이 대리(33)는 지난해 여름휴가 때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서 꿈 같은 휴가를 보냈다. 그때까지 화려한 ‘싱글 라이프’를 즐기던 이 대리의 최대 ‘적’은 바로 어머니였다. 이 대리의 어머니는 ‘올해는 반드시 이 녀석을 시집 보내고 말겠다’는 일념으로 LA 현지에 한인 2세와의 맞선 자리를 마련했다.

결혼에 별 관심이 없어 그 전까지 어머니가 마련한 맞선 자리를 수차례 차버린 이 대리도 이 이색적인 제안에는 마음이 움직였다. 상대는 현지 금융회사에 다니는 건장한 금융인이었다. LA 현지 맞선에서 서로에게 끌린 두 사람은 곧바로 장거리 연애에 들어갔다. 시간 날 때마다 서울과 LA를 오가며 사랑을 확인했다. 둘은 올 연말에 결혼한다. 이번 여름휴가 때는 예비 신랑이 서울에 와서 상견례까지 마쳤다. 이 대리는 “남편 될 사람을 따라 미국에 가서 살 예정”이라며 “여름휴가가 내 인생을 바꿔놓을지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휴가철에 보는 이직면접

전자회사 마케팅 부서에서 일하는 최 대리(31)는 올 여름휴가를 색다르게 보낼 계획이다. 입사 5년차인 그는 올초부터 이직을 준비하고 있다. ‘아무리 안정적인 대기업이어도 관료화된 지금 직장에서는 희망을 찾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다. 최 대리는 상반기 내내 외국계 회사들과 정보통신기술(ICT) 기반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을 중심으로 경력직 입사를 알아봤다. 훌륭한 스펙으로 예상보다 많은 기회가 왔지만 문제는 면접이었다. 회사당 한두 번 면접을 봐야 했는데, 회사 일 때문에 일정을 잡고도 펑크 내는 일이 몇 차례 발생했다. 친구 어머니 상가 조문, 친척 입원, 이사 등 각종 핑계를 대면서 연월차를 썼지만 눈치가 보였다. 일부 눈치 빠른 선배들은 “혹시 다른 회사 면접보고 다니냐”며 추궁했다. 불안함 속에 면접을 보다 보니 집중하기도 어려웠다.

그는 이달 말로 예정된 1주일간의 여름휴가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최근 이력서를 제출한 회사 세 곳의 면접을 이 때로 몰았다. 1차 면접을 통과하고 2차 면접을 보자는 회사에도 “여름휴가가 있는 주에 면접을 봐야 한다”고 못을 박았다. 회사에는 “가족들과 외국에 다녀올 예정”이라고 둘러댔다. “물론 푹 쉬지는 못하겠죠. 하지만 눈치 안 보고 맘 편히 면접을 볼 수 있어 후련해요. 잘되든 안되든 집중할 수 있어 후회는 없을 것 같아요.”

팀장 없는 사무실이 진정한 휴가지

대기업에 근무하는 강 주임(30)은 7~8월 여름휴가 시즌에 아무 곳에도 가지 않는다. 지난 5월 징검다리 연휴 때 여름휴가를 앞당겨 사용했기 때문이다. ‘어디를 가나 사람이 넘쳐나는 휴가 시즌에 휴가지에서 고생하느니, 한적할 때 미리 즐기고 오자’는 생각에서였다. 강 주임이 휴가를 미리 쓴 데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팀 막내 입장에서 윗사람들이 없는 사무실이 휴가지만큼 편하기 때문이다. 강 주임은 연차를 모아 추석 무렵 다시 한 번 여행을 다녀올 계획이다. 강 주임은 “지난주에 팀장이 휴가를 떠났을 때 업무 효율이 최대치까지 올라가는 느낌을 받았다”며 “다음주에는 맏선임이 휴가를 가는데, 오히려 더 편하게 일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쉬는 것보다 돈이 더 좋아

제약회사에서 5년째 근무하고 있는 권 대리(31)는 올해 여름휴가를 가지 않기로 했다. 상사 눈치를 보거나, 업무가 많아서가 아니다. 부서장은 일이 많지 않은 7월이나 8월에 휴가를 갈 것을 권했다. 최씨 회사는 외국인 비율이 20~30% 정도로 높아 휴가를 쓰는 데 눈치를 보는 분위기도 아니다. 권 대리는 최근 몇 년간 여름휴가 때마다 매번 해외여행을 갔다. 연차 5일을 낸 뒤 앞, 뒤 주말을 붙여 8박9일 동안 유럽, 미국, 멕시코 등지를 다녀왔다.

하지만 올해는 휴가보다는 일을 선택했다. 휴가에 드는 비용을 절약하고, 쓰지 않은 연차수당을 연말에 받기 위해서다. 5일치를 금액으로 환산하면 약 75만원이다. 권 대리는 “75만원 자체는 큰돈이 아니지만 해외여행을 갔을 때 써야 할 돈을 아낀다고 생각하면 금액이 꽤 큰 셈”이라며 “요즘은 휴가를 포기하고 일하는 동료들이 많다”고 말했다.

그래도 해외여행이 최고

중견 건설사에 다니는 강 과장(36)은 2주 전 큰맘 먹고 아내와 스페인으로 여름휴가를 떠났다. 최대한 즐기기 위해 전주 토요일에 출국해 그 다음주 일요일 밤 비행기로 돌아오도록 스케줄을 짰다.

여행은 즐거웠다. 하지만 돌아오는 길이 문제였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환승 공항인 터키 이스탄불로 가는 비행기가 한 시간이 지나도 뜨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스탄불 공항이 꽉 차서 기다려야 한다는 게 이유였다.

이스탄불 공항에서 서울행 비행기로 갈아타는 환승 대기시간이 2시간밖에 되지 않았던 터라 강 과장은 초조해졌다. 환승시각을 40여분 남겨놓고 도착한 강 과장은 아내와 함께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지만, 비행기는 이미 떠난 뒤였다. 결국 강 과장은 다음 비행기를 타고 월요일 아침에야 한국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마침 비즈니스 캐주얼로 보일 수 있는 재킷과 면바지를 가져온 게 다행이었다. 강 과장은 인천공항에서 옷을 갈아입은 뒤 곧바로 회사로 향했다. 짐은 아내에게 맡겼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말이 실감난 휴가였습니다. 이 또한 추억이라고 생각해야죠.”

홍선표 기자 ricke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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