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미 기자의 경제 블랙박스
세종의 화폐개혁은 왜 실패했을까

위인의 성공담보다 더 마음을 끄는 것은 실패담이다. 조선 최고의 성군으로 꼽히는 세종(재위 1418~1450)의 이야기라면 더욱 그렇다. 그가 끝까지 다스리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화폐였다. 신세돈 숙명여대 교수가 지난해 한국경제학회에서 발표한 ‘세종의 화폐개혁 실패원인’은 그 과정을 자세히 다룬다.

고려시대엔 쌀과 베, 즉 미포(米布)가 화폐 역할을 대신했다. 조선 초기에도 관습이 이어졌지만 태종은 이를 바꾸려고 했다. 화폐 발행 권한을 국가가 독점해야 경제적 이득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세종의 화폐개혁은 왜 실패했을까

그는 1402년부터 닥나무로 만든 화폐 ‘저화(楮貨)’를 발행했다. 하지만 백성들은 외면했다. 종이는 쌀 같은 실물가치가 없는 데다 위조도 쉬웠다. 저화 가치는 폭락했고 재정도 흔들렸다. 태종은 세금과 벌금을 세 배로 인상해야 했다.

1418년에 즉위한 세종은 구리로 만든 주화를 대안으로 생각했다. 구리는 종이보다 실물가치가 높고 위조도 어렵기 때문이다. 구리가 들어간 그릇과 기물을 백성들에게 걷고 광산을 개발했다. 1425년 2월 주화가 발행됐다.

세종은 화폐개혁의 성공이 신뢰 확보에 달렸다고 믿었다. 화폐가치를 유지하려면 주화가 널리 쓰여야 한다. 상인들이 주화를 안 쓰면 경범이라도 곤장 100대에 가산을 몰수하도록 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주화를 멀리했다. 공식적으로 주화 1문(100문=1냥)은 쌀 한 되 가치로 정해져 있었다. 그런데 시장에서는 3문을 줘야 한 되를 살 수 있을 정도로 주화 가치가 떨어졌다. 작황에 따라 쌀값은 오르고 내리는데 법정가격이 고정돼 있으니 주화로 거래할 사람이 없었다.

그제야 세종은 화폐가치를 시세에 따르도록 했다. 하지만 주화에 대한 신뢰가 떨어진 뒤였다. 주화 통용을 강제한 법 때문에 방화사건이 발생하는 등 민심은 흉흉했다.

당시 세종은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저화보다 주화가 나은데 백성이 왜 싫어하는지 모르겠다”(세종 9년)고 낙담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주화 제도가 백성에게 편리하다는 확신은 여전했다.

세종은 포기하지 않고 주화 유통을 활성화하는 계획에 착수했다. 국가가 매달 100석씩 묵은 쌀을 내다 팔고 주화를 거둬들였다. 그러면 시중 쌀값이 떨어져 주화가치가 안정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화폐개혁 4년 뒤인 1429년 쌀 한 되 값은 주화 13문까지 급등했다.

구리 조달도 문제였다. 광산 탐사는 힘들었고 백성들에게 걷을 구리도 한계가 있었다. 구리값이 오르자 사람들은 주화를 녹여 물건을 만들어 팔았다. 구리 함량이 적은 새 주화를 만들거나 시중 동전을 환수해 물가를 낮춰야 했다. 하지만 이미 동전의 역할을 쌀 같은 다른 물건이 대체하고 있었다. 통화정책이 무의미해진 것이다.

세종은 가격이 낮은 무쇠로 철전을 만들 생각도 했다. 다만 동전을 싫어하는 백성이 철전을 좋아할지 불투명했다. 1445년 세종은 결국 태종의 저화를 부활시켰지만 이 역시 외면당했다.

그의 화폐개혁은 왜 실패했을까. 신 교수는 “세종은 화폐제도의 핵심을 꿰뚫고 있었던 앞선 인물”이라고 평가한다. 세종은 주화제도가 성공하려면 국가가 제도를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신뢰감을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원칙은 맞았지만 등잔 밑이 어두웠다. 당시 관공서는 재정을 충당하는 과정에서 물가상승에 따른 피해를 막으려고 쌀 같은 현물을 받았다고 한다. 현물거래의 처벌 주체가 현물을 거래하니 일반 백성들이 통화제도를 신뢰할 리가 없었다. 백성들이 쓸 수 있는 낮은 화폐단위를 고안하지 못한 것도 아쉬운 점이다. 가장 이상적인 화폐였지만 백성들의 돈 사정에 응답하는 데엔 실패했다.

김유미 경제부 기자 warmfront@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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