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직자·퀵서비스 대상 보이스피싱 심부름 주의보

시급10만원·숙식·차량 제공 등
구직사이트에 광고 올려 보이스피싱 인출책으로 사용
'검은 돈' 의심하면서도 일 맡아…그만두려 할땐 협박 받기도
대포통장·카드 운반책으로 퀵서비스 기사 악용하기도
보이스피싱이 조직화 및 대형화하면서 퀵서비스 기사나 아르바이트 구직자와 같은 일반인들을 범죄에 끌어들이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서울 광화문 일대에서 의뢰받은 물건을 배달 중인 퀵서비스 기사(사진 왼쪽)와 구직사이트에서 아르바이트 자리를 알아보고 있는 구직자. 강은구기자 egkang@hankyung.com

보이스피싱이 조직화 및 대형화하면서 퀵서비스 기사나 아르바이트 구직자와 같은 일반인들을 범죄에 끌어들이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서울 광화문 일대에서 의뢰받은 물건을 배달 중인 퀵서비스 기사(사진 왼쪽)와 구직사이트에서 아르바이트 자리를 알아보고 있는 구직자. 강은구기자 egkang@hankyung.com

지난 25일 서울 서대문경찰서는 보이스피싱(전화금융사기) 조직의 ‘인출책’으로 일한 혐의로 20~30대 10여명을 구속했다. 이들은 구직사이트에 올라온 고액 아르바이트 모집글을 보고 지원해 일하다가 결국 범죄의 늪에 빠지고 말았다. “보안 문제로 번거로운 송금 절차를 거치는 것”이라는 사기 조직의 꼬임에 넘어간 구직자들은 경찰에서 범죄와 관련된 일인 줄 몰랐다고 진술했다.

지난달에는 보이스피싱 조직과 결탁한 퀵서비스 업체에 고용돼 대포통장을 배달한 혐의로 한 퀵서비스 기사가 불구속 입건됐다. 그는 “업체 대표의 지시에 따라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모른 채 배달했다”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보이스피싱이 조직화·대형화하면서 범죄에 필요한 인력 충원을 위해 일반인을 끌어들이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인출책과 운반책이 돼 범죄의 구렁텅이에 빠져드는 ‘억울한’ 피의자도 나오고 있다.

“인출직원 찾습니다”…청년 구직자 겨냥

보이스피싱 조직은 인터넷을 통해 인출책·운반책을 모집하는 수법을 주로 사용한다. 대형 포털사이트인 구글 네이버 등에서 ‘인출직원 구함’이나 ‘인출직원 모집’으로 검색하면 10개가 넘는 아르바이트 모집글이 뜬다. ‘시급 5만~10만원을 보장한다’는 파격적인 제안은 물론 숙식과 차량까지 제공한다는 글도 눈에 띄었다.

그러나 어떤 돈을 어떤 방식으로 인출하는지, 어떤 회사에서 근무하게 되는지 등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올린 게시자는 한 명도 없었다. 구직난에 시달려온 사람들에겐 이처럼 높은 시급과 파격적인 부대 조건은 뿌리치기 어려운 유혹일 수밖에 없다.

경찰 관계자는 “과거에는 조선족이나 중국인 유학생을 인출책으로 썼던 보이스피싱 조직이 최근엔 내국인을 꼬드겨 고용하는 추세”라고 말했다.

서울 서대문경찰서에 적발된 보이스피싱 인출책 14명은 모두 취업사이트에 올려진 글에 현혹된 20~30대 청년들이었다. 이들은 ‘통장·현금카드를 이용해 현금을 인출하는 일을 해주면 상당한 보수를 주겠다’는 광고를 보고 지원했다. 사기 조직은 이 과정에서 “경찰과 같이하는 일이라 문제가 없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모르고 했더라도 처벌 못 면해

[경찰팀 리포트] '고수익 알바'인 줄 알았는데…보이스피싱 연루된 청년 구직자

사기 조직의 감언이설에 속아 고용된 ‘인출 알바’들은 지난해 9월부터 넉 달 동안 수도권 일대의 금융회사를 돌아다니며 ‘대포통장’ 계좌를 이용, 보이스피싱 피해금 46억원을 인출해 중국으로 보냈다. 뒤늦게 보이스피싱과 연계된 것을 알고 그만두려 한 사람도 있었다. 그러자 사기 조직은 “도망가면 흥신소 직원을 보내 끝까지 찾을 것”이라고 협박해 범죄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도록 했다.

지난해 11월에도 인터넷 구인 광고글에 현혹돼 보이스피싱 조직의 인출책을 떠맡았던 10명이 경찰에 검거됐다. 이들 역시 검거된 이후 “좀 문제가 있는 돈이라는 느낌은 들었지만, 보이스피싱 피해금이라는 사실은 몰랐다”고 진술했다. 백의형 서대문경찰서 지능팀장은 “아르바이트 일자리를 찾을 때는 직장 소재지와 하는 일, 그 일이 법에 저촉되는 것은 아닌지 꼼꼼하게 따져봐야 한다”고 말했다.

보이스피싱 범죄에 연루된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인출책으로 일했더라도 일단 적발되면 무혐의로 풀려나기 쉽지 않다. 2008년 보이스피싱 조직의 일당으로 일하는 친구를 도와 현금을 인출해주고 100만원을 받은 한 중국인 유학생은 “인출한 돈이 어떤 돈인지 몰랐다”는 진술로 1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다음해 항소심에선 징역 8월을 선고받았다. 당시 재판부는 “전화금융사기 수법은 이미 언론을 통해 널리 알려진 만큼 피고인 스스로 ‘인출한 돈이 보이스피싱에 의한 것’이라는 인식 정도는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고 판시했다.

대포통장 운반에 퀵서비스 악용도

퀵서비스 기사가 보이스피싱 사기 과정에 개입되는 사례도 적지 않다. 대부분의 보이스피싱 조직이 대포통장이나 카드를 운반하는 데 퀵서비스를 이용하고 있어서다.

지난달 말 서울 강남경찰서는 중국 보이스피싱 사기단과 결탁, 5000회에 걸쳐 대포통장과 대포폰 등을 배달한 혐의(사기방조 및 전자금융거래법 위반)로 한 유명 퀵서비스 업체의 대표를 구속했다. 이와 함께 이 업체에 소속돼 일하던 퀵서비스 기사 A씨를 불구속 입건했다. A씨는 “사장이 시키는 대로 배달한 것뿐”이라고 항변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용우 강남경찰서 지능팀장은 “적발된 퀵서비스 기사들은 대부분 ‘보이스피싱 조직과 관련된 줄 몰랐다’며 무혐의를 주장한다”며 “배달장소가 물품보관함 등 수상한 곳이거나, 수당을 평소보다 많이 받고도 ‘검은돈’인 것을 몰랐다고 주장하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라고 말했다.

일부에서는 퀵서비스가 화물자동차운수사업법의 적용을 받지 않고 있어 보이스피싱 사기에 악용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퀵서비스를 규제하는 법이 없어 설립 신고만 하면 특별한 제약 없이 회사를 운영할 수 있다. 배송 과정에서 발신자·수신자 및 내용물 기록을 남길 의무도 없다.

이태형 한국교통연구원 연구위원은 “제도권 밖에 있는 퀵서비스는 감시와 추적이 쉽지 않아 범죄에 악용될 가능성이 크다”며 “퀵서비스를 택배사업처럼 제도화한다면 범죄 조직이 악용하는 사례를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윤희은 기자 soul@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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