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은 이른바 ‘민주화’의 원년으로 불린다. ‘직선제’ 개헌이 이뤄지면서 민주화 시대가 열렸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1987년 이후 정치적 자유는 확대됐지만 경제적 자유는 정점을 찍고 오히려 내리막을 걸었다.”(김인영 한림대 정치행정학과 교수)는 평가도 있다.
[한경 특별기획] 선거 다음 해엔 성장률 뚝…30년간 나라 망친 '주범'은 정치
그 결과는 경제성장 모멘텀의 단절이다. 이듬해 ‘88올림픽’ 특수가 만들어낸 두 자릿수 성장률은 사실상 이때가 마지막이었다. 이후 대통령선거 때마다 당선자들이 제시한 임기 내 성장률 목표는 절반도 이뤄내지 못했다. 오히려 대기업의 규제가 일상화됐고, 복지 요구는 봇물 터지듯 했다. 선거 때마다 쏟아지는 포퓰리즘(대중인기영합주의) 공약은 성장 잠재력을 훼손했고, 나라 곳간을 홀쭉하게 만들었다. ‘대의 민주주의’라는 기치를 내걸고 국회로의 권력 집중 현상이 가속화되면서 국회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며 불합리한 정책과 법안을 양산했다. 현진권 자유경제원 원장은 이를 “정치실패”라고 규정했다. 그러면서 “지난 30년간 한국을 망친 주범인 낡은 정치를 그대로 둔다면 30년 후의 미래도 암울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정치실패가 어떻게 나라를 망쳐왔는지, 세 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민주주의 꽃이 잉태한 ‘악마’…빚덩이 票퓰리즘 공약

‘수도권 외곽 주민에게 접근의 자유를 누리게 하자.’ 1995년 이인제 경기지사 후보는 이런 구호를 내걸고 경전철 사업의 시동을 걸었다. ‘풀뿌리 민주주의’라고 불리는 지방자치단체장 선거가 시행된 첫해다. 이듬해 총선을 지나면서 대표적인 경전철 사업으로 주목받은 용인 경전철은 1999년 보궐선거와 2002년 지방선거에서 ‘표’를 쓸어담는 공약으로 떠올랐다. 실행단계로 굳어진 것도 당연했다. 당시 교통개발연구원은 ‘하루 이용객 16만명’이라는 예측치를 내놓았다. 자신감을 얻은 용인시는 사업 시행자에게 30년간 최소 운영수입보장(MRG)까지 약속했다. 실제 운임 손실이 예상치의 90% 미만일 경우 그 차액을 보상해주는 약정이었다.
이용객 부족으로 매년 적자에 허덕이고 있는 용인 경전철. 한경DB
이용객 부족으로 매년 적자에 허덕이고 있는 용인 경전철. 한경DB
하지만 검찰 수사 결과 교통개발연구원의 예측치는 선거 공약을 뒷받침하기 위해 수요 예측을 부풀린 것이었다. 2011년 경기개발연구원을 통해 다시 조사한 결과 ‘예상 승객은 3만명’에 불과했다. 2013년 개통 이후 현실은 더 참담했다. 하루 평균 이용객 수는 1만명에도 못 미쳤다.

결국 용인시가 경전철 건설에 따른 지방채 발행액, 투자금 상환, 운영지원비 등을 다 합쳐 향후 30년간 지출해야 하는 금액은 1조9400억원에 이른다. 용인시의 연간 예산보다 많은 금액이다. 용인시민의 세금으로 메워야 하는 건 당연하다. 민주주의의 꽃으로 불리는 선거 바람을 타고 시작된 용인 경전철 사업은 이렇게 시민들에게 빚덩어리를 안긴 ‘악마’로 변신했다.

손의영 서울시립대 교통공학과 교수는 “1987년 이후 선거 등 정치적인 이유로 타당성 조사 없이 추진된 도로 철도 공항 등 인프라 사업이 부지기수”라며 “이는 대규모 재정낭비는 물론 효율성과 안전 측면에서도 심각한 문제를 낳게 된다”고 말했다.

공무원연금 개혁 매번 실패하는 이유…“票 날아가니까”

지난 8월 초 서울 삼청동 총리 공관에서는 공무원연금 개혁안 마련을 위한 첫 고위 당·정·청 회의가 열렸다. 안종범 청와대 경제수석은 공무원연금 개혁의 시급성을 강조하며 당이 앞장서 법안을 마련해 달라고 요청했다. 안 수석의 말이 끝나자마자 당쪽 참석자는 “왜 당에 총대를 메라고 하느냐. 표 떨어지는 일인지 모르면서 그러느냐”고 대놓고 불만을 터뜨렸다. 결국 공무원연금 개혁안 마련은 당시 안전행정부로 공이 넘겨졌고, ‘셀프 개혁안’이라는 비판을 받으며 법안 마련이 두 달 가까이 지연됐다. 우여곡절 끝에 여당이 법안을 내긴 했지만, 연내 통과될 가능성은 낮다.

서비스 산업 육성 정책도 마찬가지다. 지나치게 수출에 의존하는 경제의 허약한 체질을 바꾸기 위해 내수와 수출이 이끄는 이른바 ‘쌍끌이 경제’를 모토로 내걸기 시작한 것은 김대중 정부 때다. 내수를 키우기 위한 전략으로 제시된 서비스산업 육성 정책도 당시 시작됐다. 하지만 이후 정권이 세 번이나 교체됐지만 아직도 ‘슬로건’으로 남아 있을 뿐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고 있다. 이 정부 들어서도 서비스 산업 육성과 관련된 법률은 죄다 관련 상임위원회조차 통과하지 못한 채 몇 년째 발이 묶여 있다.

노동개혁 법안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국회에 계류 중인 노동 관련 법안은 480여개에 달하지만 한 건도 통과되지 못하고 있다. 이유는 국회에 있다. ‘표’에 불리하다고 판단한 정치인들이 퇴짜를 놓기 때문이다. 지난 정부에서 경제수석을 지낸 전직 관료는 “공무원연금 개혁처럼 국가의 중장기 경쟁력을 높이는 아젠다 법은 국회에서 찬밥 신세”라며 “대부분 이해가 걸린 집단의 반발로 당장 표에 도움이 안 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당선 되니 말 바꾸는 의원

2012년 대선 때 일이다. 여당 지도부를 지낸 A의원은 당시 대선 공약이던 ‘하우스푸어’ 대책을 놓고 열변을 토했다. “정부 재정으로 개인의 빚을 보전해줄 수 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A의원은 “재정 부담이 대수냐”며 언론이 비판을 위한 비판을 해댄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A의원은 불과 몇 년 전 국가부채가 1200조원에 육박한다며 정부의 재정 계획을 앞장서 비판하는 대표주자였다. 오죽했으면 국가부채가 A의원의 가장 큰 정치적 자산이라는 말까지 들었을까. 정치인은 이처럼 ‘표’ 앞에서는 소신도 쉽게 포기할 줄 아는 유연성을 가졌다. 선거 때마다 포퓰리즘 공약이 난무하고, 선거 후에는 공약을 무리하게 밀어붙이느라 재정이 타격받고 경제가 휘청거리는 것도 고질적인 현상이 됐다. 실제 1987년 직선제 개헌 이후 열 번의 선거 중 일곱 번의 선거에서 이듬해 성장률이 떨어졌다.

■ 특별취재팀=하영춘 금융부장, 차병석 IT과학부장, 정종태 정치부 차장, 박수진 산업부 차장, 안재석 IT과학부 차장, 이태명 산업부 기자, 임원기 경제부 기자

정종태 기자 jtch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