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조영남 기자 jope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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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상처의 회복은 사회민주적인 폭동의 억압뿐만 아니라 노동자들의 복지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엥겔스도 놀란 복지정책…노동자 향한 비스마르크의 구애였다
1881년 독일의 빌헬름 1세가 총리인 오토 폰 비스마르크를 통해 의회에 보낸 칙서의 주요 내용이다. 이 칙서가 독일, 나아가 전 세계를 복지국가로 나아가게 하는 시발점이 됐다. 비스마르크는 철혈(鐵血)재상으로 불리는 바로 그 사람이다.

비스마르크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프로이센에 의해 독일 통일을 이룩하고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독일제국을 선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였다. 제국은 아직 안정되지 못했다. 정치 상황은 여전히 불안했다.

국내 정치 상황은 문화투쟁(Kulturkampf)으로 얼룩지고 있었다. 프로테스탄트파인 프로이센 중심의 독일 통일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던 남서 독일 중심의 가톨릭 교도들이 교황 지상주의를 내걸며 로마교회와 결탁하고 가톨릭 중앙당을 조직한 것이 사건의 발단이 됐다. 이들은 국가의 교회에 대한 간섭을 비난하면서 비스마르크가 추진하던 중앙집권정책에 반대했다. 독일제국을 굳건히 해야 했던 비스마르크는 이들에게 탄압을 가했다. 그는 교회의 교육기관 관리제 폐지, 성직자의 정치적 설교 금지 등을 추진함으로써 이른바 문화투쟁이 전개됐다. 문화투쟁은 비스마르크가 정치적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1878년 이들에 대한 탄압을 중지할 때까지 계속됐다.

유럽에서의 연이은 혁명의 결과 대중민주주의가 시작됐고, 산업화와 더불어 급격히 증가한 노동자들은 정치세력화되고 있었다. 1871년 인구의 5분의 1 수준이던 노동자의 수는 1880년대 초에는 4분의 1로 급증했다. 더구나 많은 노동자들이 사회주의화되고 있었다. 1873년부터 시작된 장기불황은 사회주의 세력이 자라기에 좋은 토양을 제공했다.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세력 일부가 1863년 전독일노동자협회를 창설했고, 또 다른 일부는 독일사회민주주의노동당을 창당했다. 양 단체는 1875년 고타에서 합동대회를 열고 독일사회주의노동자당으로 통합된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존재하는 독일사회민주당의 뿌리를 이룬다.

이들 사회주의 세력은 의회까지 진출해 독일제국을 흔들었다. 자유로운 보통·직접선거에 의해 선출된 제국의회는 점점 더 민주적 경향을 가진 대중민주주의의 도구로 변화되고 있었다. 여기에 더해 1871년 2명의 의원밖에 없었던 사회주의 세력은 1877년의 총선에서 12개의 의석을 차지하는 등 기세를 올리는 반면에 비스마르크를 지지하는 정당들은 1881년의 총선에서 참패를 당했다. 의회에서는 사회주의자이면서 독일 사회민주당 창립자의 한 사람이었던 아우구스트 베벨이 공공연하게 파리 코뮌을 찬양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비스마르크는 이 일과 관련해 베벨을 대역죄로 2년의 금고형에 처하지만, 이대로 있다가는 조만간 독일에도 파리 코뮌과 비슷한 사태가 벌어지지 않을까 전전긍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스마르크가 국가적인 복지정책을 내정의 도구로 이용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이유는 바로 이러한 불안한 국내 사정 때문이었다. 1872년 비스마르크는 독일제국 황제인 빌헬름 1세에게 긴급보고서를 제출한다. 이 보고서에서 그는 국가권력과 국가적인 구호 조치를 통해 노동자들을 독일제국의 우호세력으로 끌어당길 필요가 있으며, 이를 위해 강압적인 조치는 물론 복지국가적 수단들도 이용해야 한다고 건의한다. 이른바 채찍과 당근 전략이다.

엥겔스도 놀란 복지정책…노동자 향한 비스마르크의 구애였다
비스마르크가 사회주의의 확대에 위협을 느끼고 있는 상황에서 1878년 황제인 빌헬름 1세에 대한 두 차례의 암살미수 사건이 벌어졌다. 선거에서의 참패, 제국 재정 확충 방안의 의회 거부 등으로 궁지에 몰린 비스마르크는 이를 반전의 호기로 삼는다. 그는 이 사건을 우선적으로 사회주의 세력을 억압하는 계기로 활용한다. 해산시켰던 의회가 재구성되자 이른바 ‘사회주의자법’을 통과시켜 사회민주주의적, 사회주의적, 무정부주의적 성향 단체들과 노동자들의 활동을 금지시켰다. 다른 한편으로 자신에게 우호적인 정당들이 통합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지지도는 높아지고, 이들이 차지하는 의석수도 늘어났다. 이미 1872년의 긴급보고서에서 ‘채찍’과 ‘당근’을 제안했던 비스마르크는 사회주의를 탄압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인식을 더욱 확고히 하게 된다. 그는 복지정책을 통해 노동자들을 혁명적 사회주의자들로부터 격리시킬 수 있고 또 격리시켜야만 한다고 봤다.

이러한 결과가 앞서 언급한 1881년의 황제 빌헬름 1세의 칙서다. 이후 약 10년간 독일제국은 사회보험을 기초로 하는 광범위한 복지제도를 도입하게 된다. 1883년에 병 치료비와 부상 수당 지급을 위한 건강보험법, 1884년에는 재해보상법, 그리고 1889년에는 폐질 및 노년보험법이 제정, 공포됐다. 지구 상 최초의 복지국가 모델이 탄생한 것으로, 이는 오늘날의 독일 사회보장제도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이런 독일제국의 행보에 사회주의 세력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독일 사회주의자들의 리더였던 베벨은 엥겔스와 함께 이 법안에 반대표를 던져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고, 실제로 그렇게 행동했다. 그들은 자본주의체제 내에서는 그 어떠한 개혁도 노동자의 생활을 근본적으로 개선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지구 상 첫 복지국가는 사회주의자들의 반대 속에서 태어났다. 한편 자유주의자들은 복지제도를 통해 국가의 규모가 커질 것이며, 전통적인 가족관계를 붕괴시키고 자기 책임을 완화할 것이라며 반대했다. 양측 모두 반대한 것이다.

사회주의 세력을 견제하고 노동자들을 자신의 지지세력으로 끌어오기 위해 도입했던 복지국가는 결론적으로는 이른바 ‘비스마르크식 사회주의’를 탄생시켰다. 비스마르크는 사회보험 도입은 물론이고 노동자들의 환심을 얻기 위해 당시까지 매우 자유주의적이었던 경제질서에 대해 보호관세 도입을 필두로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한다. 경제주체 간의 사적인 경쟁을 배제시키고, 집단적 이해에 기초해 조직화된 집단 간의 경쟁으로 대체해버리기도 했다. 자신의 정치적 목적 달성이야말로 다른 모든 것에 우선했던 것이다.

대중민주주의의 확산과 노동자들의 정치 참여, 그리고 이들의 정치세력화와 이들을 기반으로 한 사회주의 세력의 체제전복 위협이 복지국가의 탄생을 불러 왔다. 이후 나타난 복지국가는 자유주의자들의 최초의 우려가 맞았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대중민주주의의 확산과 더불어 시작된 복지제도는 국가 규모와 역할을 계속해서 증대시키는 추동력이 돼 왔다.

권혁철 < 자유경제원 자유기업센터 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