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戰 '최고의 전사' 서경석 前 동티모르 대사

올 베트남 파병 50주년
진정한 리더 덕목은 '넓은 사고'
부하·포로·지형·날씨…전장에선 모든 얘기 경청해야

동티모르 '나눔의 천사'
사비까지 털어 '생활용품 폭격'
'한국은 은혜로운 나라' 인식 심어
우리 국민성엔 용맹함 담겨있죠
정동헌 기자 dhchung@hankyung.com

정동헌 기자 dhchung@hankyung.com

호국보훈의 달이다. 올해는 또 베트남 파병 50주년이 되는 해다. 서경석 전 동티모르 대사(예비역 중장)는 베트남 전쟁이 낳은 한국군 사상 ‘최고의 전사(戰士)’로 통한다. 파월 맹호부대에서 대대장으로서 그와 인연을 맺었던 노태우 전 대통령은 “우리 대대의 전과 대부분은 서경석 때문”이라는 찬사를 남겼다.

포탄 사격으로 몸이 가루가 될 뻔한 상황 등 숱한 위기를 넘기며 전장을 누볐던 서 전 대사는 주월 한국군 최초 학군단(ROTC) 출신 소총중대장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2년간 전장 경험을 담은 ‘전투감각’은 특전사 등 각군 교본으로 쓰인다. 고려대 객원교수 시절에는 조는 학생들에게 자판기 커피를 건네는 인자한 교수이자 선배(고려대 사학과 61학번)였다. 동티모르에서는 선물을 가득 싣고 오는 ‘산타 할아버지’로 불렸다. 각군 특강 등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서 전 대사를 지난 6일 현충일 서울 도곡동 자택에서 만났다.

한국에서 온 산타 할아버지

2009년 9월, 그가 동티모르에 도착한 지 이틀째 되던 날 밤부터 대사관저에 돌덩이들이 계속 날아왔다. “식민 지배 경험이 많은 나라라 외부인을 경계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밖에 나가서 보니 근처에서 뛰어놀던 애들이 던진 게 뻔했어요. 주변을 보니까 등이 휜 척추장애인이 구멍가게를 하는데 뭘 사려고 들어가보니 겨우 맥주 몇 병밖에 없더군요. 불쌍해서 한국에서 갖고 온 라면 초코파이 같은 걸 몇 박스 갖다주고 팔라고 했죠. 소문이 빨리 났나봐요. 그 다음날부터 돌이 안 날아오더라고. 이후 동네 꼬마들하고 정말 친하게 지냈습니다. 축구공 볼펜 필통 같은 것들 사다주고 같이 공도 차고.”

그가 한국으로부터 동티모르에 공수한 비누만 1회에 44TEU(1TEU는 20피트 컨테이너 1개)일 정도로 그는 동티모르에 ‘생활용품 폭격’을 했다. 정부 등 유관기관 지원뿐 아니라 재계 인사와의 개인적인 인맥과 사비까지 동원했다. 문맹률이 절반이 넘는 현실에서 기존 대사관이 하던 한국어 교육, 한국 취업 알선에도 정성을 쏟았다.

“군기문란과 행패가 심해 쫓겨난 레바논군을 대신해 왔던 게 한국 상록수부대입니다. 칼같이 오전 6시 기상해 구보하고 청소해 주고, 진료해주고, 다리 놔주고, 한글 태권도 가르쳐주고…이런 군대가 세계에 별로 없어요. 동티모르는 한국을 ‘은혜로운 나라’로 생각합니다.”

베트남에서

그의 소대장 첫 임지는 강원 화천 15사단. 철책선 근무를 이어가던 그는 상관의 조언으로 베트남에 가기로 결심했다. 육군사관학교 출신 장교들과 경쟁하려면 실전 경험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파격적인 월급과 수당도 주저없는 결정에 한몫했다.

1968년 2월 베트남에 첫발을 내디딘 그는 맹호부대 1연대 2대대 6중대에서 소대장 생활을 시작했다. 부임 초반 소대원들이 부리던 텃세를 조금씩 극복할 무렵 연대규모 작전에 앞서 당시 대대장(김영규 중령)으로부터 위험한 지역(푸캇산)에 대한 정찰 명령이 떨어졌다.

“왜 하필 나일까. 몸이 아프다고 핑계라도 대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네가 가장 적임자’라고 직접 찾아와 격려하며 명령하는 걸 듣고 ‘영광입니다. 반드시 성공하겠습니다’라는 말이 나도 모르게 나가버렸어요. 돌이켜 보니 이 순간이 제 평생 군 생활을 좌우한 것 같아요. 마음속으로 즐겁게 복종시키는 기술이랄까. 부하를 사지(死地)로 보내는 지휘관의 자세, 나를 인정해 주는 사람 앞에서의 감격….”

서 전 대사는 이듬해 4월 1연대 3대대 11중대장으로 부임했다. 수류탄 폭발사고를 온몸으로 덮쳐 살신성인한 강재구 소령(당시 대위)을 기려 ‘재구대대’로 이름났던 곳이다. 서 전 대사는 노태우 전 대통령(당시 재구대대장)을 직접 찾아가 대대 배속을 부탁했다.

생지옥을 넘나들며 중대원들과 함께 혁혁한 전과를 올린 그는 1970년 4월 귀국했다. “베트남전 참전으로 벌어들인 막대한 달러와 이를 통해 얻은 정치적 선물이 국내 경제와 산업, 과학을 일으켜 세웠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지독한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고 할까….” 베트남전에는 1964년 의무병 파견으로 시작해 1973년까지 31만여명을 파병했다.

진정한 리더란 겸손·경청·정성 그리고 용기

[人사이드 人터뷰] 서경석 前 동티모르 대사 "누군가에게 정성 다하면 그사람은 목숨 걸고 따라옵니다"

서 전 대사는 6군단장을 끝으로 1999년 5월 예편한 뒤 고려대 객원교수로 ‘지도자론’ ‘전쟁과 국가’를 10년 동안 강의했다. 육군대학에 있을 때 우연히 만난 김정배 전 고려대 총장과의 인연이 계기가 됐다. 수강생 400명이 넘는 대강의였음에도 수강신청 개시 직후 마감되는 인기 강의로 유명했다.

“리더는 겸손해야 합니다. 건방 떨면 결국 사람들은 떠납니다. 또 겸손의 연장선에서 항상 ‘경청’해야 합니다. 천재라도 서너 사람 의견을 못 따라간다는 게 제 생각이에요. 실수를 줄이는 특효약이 경청입니다. 리더는 깊이는 없어도 돼요. 깊이를 실현하는 건 전문가가 하면 되고 리더는 ‘넓은 사고’를 가져야 합니다.”

그는 베트남전 당시 얘기를 이어갔다. “지형이 말해주는 걸 듣습니다. 날씨도 얘기합니다. 정찰과 매복작전을 마치고 온 부하들이 얘기합니다. 포로의 얘기도 경청합니다. 전장 경험이 없던 초급 장교가 어떻게 전투를 했겠어요. 경청하면 답이 나옵니다.” 또 정성, 솔선수범, 용기도 반드시 필요한 리더의 덕목으로 꼽았다. “사람한테 정성을 다하면 그 사람은 목숨을 걸고 따라오게 돼 있어요. 또 위기 앞에서 비겁한 사람은 절대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는 그러나 요새 이런 리더가 드문 것 같다며 아쉬움을 표했다.

서 전 대사는 ‘균형감각’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자본주의 고도화로 부익부 빈익빈이 너무 심한데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저항과 비판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이건 청년의 특권이고, 이런 정신 없으면 우리나라는 큰일나요. 다만 테러나 폭력을 쓰면 안 되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해야 합니다.”

우리 국민의 저력을 믿어라

그는 이달 초 참전 전우들과 함께 서울 국립현충원을 찾아 채명신 전 맹호부대장(초대 주월 한국군사령관) 묘소를 찾아 참배했다. 지난해 11월 타계 후 유언에 따라 사병 묘역에 묻힌 채 전 사령관 묘비에는 ‘그대들 여기 있기에 조국이 있다’라는 비석이 있다.

“뭉클한 말이죠. ‘그대들’ 같은 의인(義人)들이 우리나라 곳곳에 사실 많아요. 요새 청년들이 어떻다 흉보는 경우가 많은데, 뭘 모르는 소리예요. 때가 되면 ‘화랑 관창’과 같이 활약할 친구들입니다. 베트남전에서도 한국군이 얼마나 조직적으로 잘 싸웠는지. 우리 국민성엔 용맹함이 내재돼 있어요. 일제시대 그 고생 끝에 해방 후 혼란, 6·25전쟁으로 쑥대밭이 되고 이후 서슬 퍼런 군부독재, 민주화 투쟁…이 모든 걸 겪고도 삼성그룹이 나오고 각계 영웅들이 나오지 않았습니까. 불가사의한 저력이 있는 나라입니다. 다른 나라는 절대 못 쫓아와요.”

그는 세월호 참사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돈과 성공만을 좇다 오랜 기간 적폐가 한꺼번에 드러난 사건인데, 소중한 생명을 너무 많이 허망하게 잃은 슬픔에 여러 방향으로 비화된 면도 있습니다. 이번 기회로 국가 곳곳에 스며든 불법과 부정한 인맥을 통해 쌓은 부패의 고리를 완전히 잘라버렸으면 좋겠습니다.”

96명 부대원 이끌고 대대급 월맹군 격퇴

서경석 장군의 '전투감각'

[人사이드 人터뷰] 서경석 前 동티모르 대사 "누군가에게 정성 다하면 그사람은 목숨 걸고 따라옵니다"

서경석 전 대사는 월맹 정규군,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일명 베트콩)과 수많은 교전을 치렀다. 소대장 시절에는 푸캇산과 프랑스 정규군이 궤멸한 ‘죽음의 계곡’, 그리고 푸캇산과 바다를 접한 평야지대 ‘고보이 평야’에서 활약했다. 월맹군과 처음 맞닥뜨린 교전에서 15명을 사살했다. ‘전투감각’에는 수많은 동굴 수색, 매복, 정글 교전 경험이 생생히 기록돼 있다. 훈련과정에서 관리부실로 M18A1클레이모어(대인지뢰)가 격발해 전우들이 사상한 비극적 경험도 있다.

중대장 시절에는 대대본부로부터 10여㎞ 떨어진 벌판에 기지를 편성하고 싸웠다. 이 과정에서 인근 마을에 교전으로 인한 피해를 안기며 ‘주민 포섭작전’의 중요성을 처음 알았다. 베트콩을 고립시키기 위해선 마을 주민의 협조가 필수적이었던 만큼 그는 마을 관리자에게 넙죽 엎드리며 저자세로 다가갔다. 모내기, 벼베기, 의무지원도 함께했다. 주민친화정책은 채명신 사령관의 원칙이기도 했다.

미군도 함께 근무를 서던 일명 ‘166 고지’를 지키면서 적에게 기관총을 난사하다 고지 관망대로 날아온 포탄에 그대로 전사할 뻔했으나 구사일생으로 살았다. 그는 “내 몸이 가루가 될 뻔했는데 천운이 나를 보호해 준 것이 틀림없다”고 술회했다. 매복근무를 반복하다 두려움에 미쳐 소총으로 자신의 발을 쏜 병사를 전출시킨 일화도 있다.

고지 주변으로 집결한 400여명의 대대급 월맹 정규군을 상대로 95명의 부대원을 이끌고 야간습격작전을 감행해 38명을 사살했다. 이를 통해 충무무공훈장을 받았다. 원래는 을지무공훈장, 월남최고훈장, 미국 은성무공훈장이 동시에 상신됐으나 부대원들의 포로학대죄 책임으로 을지무공훈장은 충무무공훈장으로 한 단계 격하됐으며 나머지 2개 훈장은 취소됐다. 민간인 습격을 일삼으며 꾸이년반도 갯벌에 은신해 있던 월맹군 게릴라본부를 소탕한 전투 얘기는 손에 땀을 쥐게 한다. 베트콩 안내역을 하던 베트남 여인 마이를 교전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다치게 하고 포로로 동행하다 결국 저승으로 보낸 경험을 말할 때 그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귀국 후 전방부대에서 근무할 때 계속 이 여인의 환영이 나타나 무척 고생했다고 했다. 그는 “유명을 달리한 전우들과 마이 여인을 비롯한 모든 분의 명복을 엎드려 빈다”고 말했다.

이해성 기자 ih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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