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최대 사기대출 방치한 금융시스템 '엉망'

주범들 수영장 딸린 별장에 도박 등 수백억원 쓰며 호화생활

KT ENS 협력업체들이 5년간 1조8천억원이 넘는 천문학적인 사기대출을 벌일 수 있었던 것은 금융권의 부실한 대출 관리 시스템 때문이었다.

17일 경찰에 따르면 은행권은 대출 사기를 저지른 일당이 제출한 세금계산서도 제대로 확인하지 않는 등 대출 관리를 허술하게 한 것으로 드러났고, 사기행각에 금융감독원 직원도 개입한 사실이 확인됐다.

주범들은 은행에서 빌린 수백억원으로 별장이나 아파트를 구입하거나 외제차를 몰며 '성공한 기업인' 행세를 하다가 발각돼 철창에 갇히거나 남태평양의 이름도 생소한 섬나라로 도주하는 신세가 됐다.

◇ 은행, 가짜 세금계산서 확인도 안해
금융기관들은 대기업인 KT의 자회사인 KT ENS가 매출채권을 양도한다는 내용의 승낙서만 믿고 거액의 대출을 해 준 것으로 드러났다.

KT ENS 협력업체들이 허위 매출채권으로 담보 대출을 받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서류는 이들 업체가 낸 허위 세금계산서였지만 진위를 제대로 확인한 은행은 없었다.

경찰 관계자는 "세금계산서에 1회 매출액이 적게는 10억원에서 많게는 50억원까지 찍혀 있고 이와 같은 세금계산서 수백장이 제출됐지만 금융기관들은 이 계산서가 세무서에 신고됐는지, 세금계산서 내용과 같이 실제 매출이 있었는지 자세히 확인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휴대전화 주변기기만 만들어 유통해 온 KT ENS 협력업체들이 휴대전화 단말기를 납품했다고 속이고 사기대출을 벌였지만 이를 의심한 은행은 한 곳도 없었다.

허위 매출채권을 만들어 줘 사기 대출을 도운 KT ENS 김모(51.구속) 부장의 소속도 휴대전화 단말기를 취급하는 모바일사업팀이 아니라 시스템영업개발부였다.

김 부장이 위조한 서류는 KT ENS 내부 서류와 형식이 달랐지만 역시 이를 의심한 금융기관은 없었다.

◇ KT ENS 인감도장은 아무나 집어 갈 수 있었다
이번 사기 대출에 KT ENS 협력업체들이 KT ENS에 납품하지도 않은 휴대전화 단말기와 내비게이션에 대한 허위 매출채권 양도 승낙서가 은행 등 금융기관에 담보로 이용됐다.

이 문서에는 KT ENS의 법인 인감도장이 이용됐는데, 부정 대출을 도운 KT ENS 김 부장은 이 도장을 관리자의 감시가 소홀한 점심 때 등을 이용해 몰래 꺼내 서류 위조에 사용했다고 진술했다.

이는 KT ENS 측이 "인감 도장은 금고에 넣고 점심때나 퇴근할 때도 금고 열쇠를 집에 가져가는 등 철저하게 관리했다"고 주장한 것과는 배치되는 것이다.

경찰 조사 결과 KT ENS 인감은 누구나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허술하게 관리돼 온 것으로 드러났다.

KT ENS 인감은 정직원이 아닌 아르바이트생이 관리하기도 했으며 관리자 서랍이나 책상 위에 놓아두면 필요한 직원들은 누구나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던 것으로 파악됐다.

이에 대해 KT 측은 "경찰 발표 내용과 달리 평소 인감 도장을 적절하게 관리해 온 것으로 알고 있다.

수사가 아직 진행 중이니 결과를 기다려보겠다"고 말했다.

◇ 비리 적발자에서 공모자가 된 KT ENS 부장
KT ENS 김 부장은 애초 협력업체들이 은행에 낸 세금계산서가 부풀려진 사실을 적발하면서 이들과 연결된 것으로 조사됐다.

2007년 중순 협력업체인 중앙티앤씨가 휴대전화 주변기기를 납품하고 매출 채권을 담보로 은행에서 대출을 받는 과정에서 세금계산서의 납품 단가가 부풀려진 사실을 김 부장이 알아챈 것이다.

김 부장이 항의하자 중앙티앤씨는 오히려 김 부장에게 돈으로 접근해 포섭했다.

김 부장은 2007년 8월부터 12월까지 4천600만원을 받고 세금계산서가 날조된 사실을 눈감아 줬고, 이들과 이후 해외 원정도박 등으로 유착 관계를 맺게 되자 오히려 적극적으로 이들과 짜고 사상 최대 사기 대출 사건을 함께 연출해 쇠고랑을 차게 됐다.

◇ 수영장 딸린 별장…수백억원 호화생활에 탕진
사건의 핵심 용의자인 KT ENS 협력업체 엔에스쏘울 전모(51.수배중) 대표와 중앙티앤씨 서모(44.구속) 대표는 대출받은 돈을 주로 자신들이 기존에 받은 대출금을 돌려막는 데 사용했지만 수백억원은 자신들의 아파트나 별장을 장만하거나 고급 외제차를 굴리는 데 흥청망청 쓰며 호화로운 생활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은 서씨가 개인적으로 부동산 구입 등에 311억원, 전씨는 560억원 가량을 쓴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서씨와 전씨는 인천 부평에 175억원을 들여 창고를 매입했고 양천구 목동에 100억원짜리 건물을 함께 사들이기도 했다.

서씨는 2010년 12억원을 들여 자신이 보유하고 있던 충북 충주 나대지에 지하 2층, 지상 2층 규모의 호화 별장을 지어 부친에게 맡기기도 한 것으로 조사됐다.

별장에는 연못과 수영장, 족구장이 딸려 있고 지하에는 노래방 시설도 완비돼 있으며 외국산 고급 마감재를 사용했다고 경찰은 전했다.

전씨는 15억원짜리 판교의 고급 빌라를 구입해 내연녀에게 선물하기도 한 것으로 파악됐다.

이번 사건은 사상 최대 사기 대출 사건으로 기록될 전망이다.

이들 일당이 대출금 돌려막기에 쓴 1, 2 금융권의 이자만 900억원에 달했고 명동 사채를 끌어 쓴 비용만 200억원이었다.

경찰 관계자는 "미상환 금액 중 600억원 가량의 행방이 묘연하지만 대부분 해외로 달아난 전씨가 도박 등으로 탕진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 끝나지 않은 수사… 금감원 등 금융권으로 확대
경찰은 수사 과정에서 금융감독원 팀장 김모(50) 팀장이 깊숙이 개입한 정황을 포착하고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

1월 말 금감원이 사건 조사에 착수해 KT ENS 협력업체들의 대출이 막히자 서씨 등이 김 팀장에게 전화해 배경을 물었고, 이에 김 팀장은 조사를 담당한 팀장으로부터 어떤 조사가 이뤄지고 있는지 알아내 자세한 내용을 알려준 것으로 파악됐다.

김 팀장은 지난달 3일 서씨 등에게 "금감원에 지금으로선 대출금을 갚을 수 없는 상황이라고 설명해주겠다"고 말하기도 한 것으로 조사됐으나 실제로 김 팀장이 금감원 조사팀에 이와 같은 내용을 전달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고 경찰은 설명했다.

김 팀장이 단순히 정보 제공에 그치지 않고 사건을 무마하려고 이들과 수시로 협의하며 대책을 논의한 것으로 보이는 대목이다.

다음 날인 2월 4일 서씨는 지방으로 잠적했고 전씨는 홍콩으로 달아났다가 남태평양 바누아투 공화국으로 향한 사실이 알려진 이후 행방이 묘연한 상태다.

경찰은 김 팀장과 조사 실무팀 직원 등을 불러 경위를 파악하고 있으며, 윗선이 개입했는지 확인할 방침이다.

이와 함께 경찰은 금융기관에 대한 로비 의혹을 규명하기 위해 해외로 달아난 전씨 검거에 주력하고 있다.

서씨는 경찰 조사에서 은행 등 금융기관 로비설을 묻자 "전씨가 다 알아서 한 일"이라며 전씨에게 미루는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은 금감원 직원에 대한 로비까지 벌인 이들이 은행 직원들에게도 접근했을 개연성이 크다고 보고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윤종석 기자 banana@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