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과장 & 李대리] 서로 공개 디스하며 '의형제'라더니…이미 '썸'타고 있던 중…혼수준비 마쳐
“동현씨는 참 좋은 사람 같아요.”

입사 4년차 이동현 대리는 며칠 전 여자 동료 S가 남기고 간 한마디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회식을 마친 뒤 택시를 잡기 위해 터벅터벅 걷던 두 사람. 자꾸 술을 권하는 박 부장의 뒷담화를 듣다 둘이 가볍게 시작한 대화는 서로 직장생활의 고충을 털어놓는 솔직 토크로 이어졌다. 몇 달 전 경력직으로 입사한 뒤 회사 적응이 힘들었다는 S는 “늘 따뜻하게 말을 걸어준 동현씨가 고맙다”고 했다.

그날 이후 S와 이 대리는 둘만의 커피 브레이크가 잦아졌다. 솔로 생활 1년째인 이 대리는 S가 가끔 지어 보이는 알 듯 말 듯한 미소의 의미가 궁금하다. 하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그녀에게 대시할 용기는 아직 없다고. 이 대리와 S, 지금 두 사람의 관계는 뭘까.

◆넘을까 말까, 아슬아슬한 그 선

요즘 유행어 중에 ‘썸(some)’이라는 게 있다. 썸은 사귀는 건 아니지만 마치 사귈 듯 말 듯 줄타기를 하는 남녀 간의 묘한 관계를 말한다. 조상님 시절 언어로 표현하자면 ‘연정’ 정도랄까? 동사로는 ‘타다’를 붙여 쓴다. “A는 B랑 요즘 썸 타는 것 같다” 식으로 표현하면 올바른 사용법!

남녀가 모인 곳엔 상열지사가 뒤따르는 법이다. 직장에서도 썸 타는 김과장 이대리들이 적지 않다. 팽팽한 러브 게임을 즐기는 직장인들의 ‘썸 백태’를 들여다봤다.

전자회사에서 일하는 황 대리와 윤 대리는 최근 깜짝 결혼 발표로 주변을 놀라게 했다. 입사 직후부터 유난히 ‘꿍짝’이 잘 맞았던 두 사람은 “사귀는 것 아니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우리는 의형제”라고 받아치곤 했다. “너는 왜 소개팅 나갈 때마다 까이느냐” “너 술버릇 진짜 진상이다”며 수위 높은 공개 ‘디스’(disrespect의 준말로 상대의 허물을 공개적으로 망신주는 것을 뜻하는 은어)도 서슴지 않던 두 사람이기에 주변에서도 그 말을 믿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우리는 의형제”라고 말하던 그즈음, 그들의 관계는 이미 썸으로 향하고 있었다. 카카오톡으로, 사내 메신저로, 퇴근 후 호프집에서, 주말에는 카페에서….

서로 외롭던 처지에 무심코 만나 많은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새 서로가 ‘삶의 일부’로 변해 있었다나 뭐라나. 이미 혼수 준비까지 마친 두 사람을 지켜본 상사 P의 총평. “역시 옛말 틀린 거 하나도 없어. 남녀 사이에 친구란 없는 거야.”

‘썸남썸녀’ 주홍글씨 지워주세요

썸은 본인 의지에 관계없이 주변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지기도 한다. 올초 한 대기업에 입사한 신입사원 S와 L은 난데없이 사내 스캔들의 주인공이 돼 놀림을 당했다. 저녁에 거하게 단체회식을 마친 뒤 술을 깰 겸 함께 산책에 나섰다가 이 회사 ‘빅 마우스’ 박 대리에게 딱 걸린 것.

S와 L은 잠시 벤치에 앉아 “많이 마셨는데 괜찮으냐”며 단순히 서로의 상태를 확인했을 뿐이다. 하지만 소문이 퍼지는 과정에서 두 사람은 야심한 밤 다정하게 썸 타던 새내기 커플로 둔갑하고 말았다. 이후 S와 L은 주위 시선이 신경 쓰여 카페에서 아메리카노 한 잔조차 같이 못 마시고 있다.

사실 대다수의 선배들은 S와 L이 실제로 사귀든 말든 별 관심이 없다. “아닌 거 알아요. 재밌잖아요! 당황해 하는 모습도 귀엽고. 나도 저렇게 풋풋할 때가 있었는데. ㅋㅋㅋ”

하지만 누군가에게 섣불리 ‘썸남’ ‘썸녀’의 누명을 씌우지 말라. 사내 열애설의 피해자는 대부분 여성이 되는 씁쓸한 현실 때문이다. 밝고 상냥한 성격의 30대 초반 싱글녀 D 대리는 억울한 ‘어장관리녀’ 이미지에 마음고생이 심했다고. 그녀는 누구에게든 반달 모양의 이효리 눈웃음을 짓는 살가운 성격의 소유자였다. 타고난 성격이 상냥한 데다 고객서비스 담당팀에서 오래 일해서 얻게 된 일종의 ‘직업병’이다.

그렇지만 사내에선 “D가 F에게 보내는 눈빛이 남다르더라” “어장관리하고 다닌다” 등의 뒷담화가 이어졌고 결국 당사자인 D 대리 귀에까지 들어갔다. 그녀의 분노에 찬 항변. “저는 사내연애 해 본 적도 없고 할 생각도 없다고요. 앞으론 회사 남자들과 확실하게 선 긋고 살래요. 날 만만하게 보지 못하게, 쫙!”

‘썸남’ 되려다 ‘껄떡남’ 찍힌다

남자들도 조심할 점이 있다. 여직원들 사이의 정보 네트워크는 생각보다 매우 끈끈하다. 어설프게 썸 만들어보려 추근댔다간 사내 이미지가 회복불능일 만큼 추해진다는 얘기다.

중견기업에 다니는 30대 후반의 Y 과장은 모든 여자 후배에게 “주말에 만나자”고 추파를 던져 ‘요주의 인물’로 찍혔다. 여직원들은 새로 입사한 여자 후배들에게 “Y와 엮이지 말라”고 언질을 줄 정도. 그런데도 아직 Y 과장은 “이번 토요일에 을왕리로 조개구이 먹으러 가자”는 식의 데이트 신청을 날리곤 한다. 답장조차 않는 후배가 늘어나는 이유를 왜 본인만 모르는 걸까.

한 정보기술(IT) 기업에서는 최근 동종업계로 이직한 C 과장의 속 보이는 어장관리가 뒤늦게 밝혀져 여직원들의 공분을 샀다. 잘생긴 외모와 매너로 사내에서 주목받았던 30대 후반의 그는 평판 좋은 성실남이었다. 하지만 퇴사한 뒤 알만한 사람들 사이에서 C 과장의 실체가 드러났다.

낮엔 숫기 없고 일만 하던 그 남자, 밤만 되면 술에 취해 여직원들에게 여기저기 전화해 기본 한 시간씩 통화하며 “첫사랑을 닮았다” “대화가 잘 통한다” “미소가 예쁘다” 등등 달콤한 작업멘트를 쏟아냈단다. 손편지를 끼운 꽃선물이나 초콜릿 기프티콘(모바일 선물 쿠폰)도 한두 사람만 받은 게 아니었다. “C 과장은 아마 새 회사에서도 그러고 있을 것”이라고 전직 동료들은 확신하고 있다. 버릇은 누구 못 주는 거니까.

“썸은 썸일 뿐…꼭 사귀어야 해?”

패션회사에 다니는 X는 썸 타던 동료 Y와 넘지 말아야 할 선의 1단계를 넘어버린 경우다. 화보 촬영을 마친 뒤 업계 관계자들과 금요일 밤 서울 이태원 클럽에 놀러간 X와 Y.

보드카 세 병에 일행 모두가 만취한 상황에서 X와 Y는 분위기에 이끌려 무대로 나갔다. 200여명이 한데 몰려 춤을 추느라 북적이던 무대에서 X와 Y는 어느 때보다 가깝게 밀착됐고, 심장을 쿵쿵 울리는 일렉트로니카 음악은 두 사람의 절제심을 무너뜨렸다.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진한 키스를 나눈 X와 Y.

다행인 것은 1단계에서 멈췄다는 데 있다. 그 이상은 없었다. 다음 날 아침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태연한 Y의 표정에 X는 “다행이다 싶었다”고 회상했다. “그런 충동적인 일 때문에 사귀게 되는 것도 싫고, 실수 한 번으로 동료와 불편해지는 건 더더욱 싫다”는 게 X의 얘기다. “썸 탔던 건 인정하지만… 꼭 결말을 봐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우리의 감정은 거기까지였던 거예요.”

임현우/김병근 기자 tardi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