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고 좁은 집엔 단란한 가족 추억만…빈소 차리지 않고 발인

"조용하고 좋은 사람들이었어요.

9년이나 잘 지냈는데 우리한테 이렇게 인사도 없이 갈 수 있나요.

"
지난 26일 숨진 채 발견된 세 모녀가 살던 서울 송파구의 반지하 주택에는 28일 짐 정리가 한창이었다.

인부들은 반지하 주택에서 쉼 없이 짐을 찾아 날랐다.

작업을 지휘하고 비용을 정산한 주인 임모(73)씨 부부는 잔뜩 찌푸린 채 기자에게 "속상하다"고 털어놓았다.

임씨는 "살면서 집세나 공과금 한 번 밀린 적 없었고 문제를 일으킨 적도 없다"며 "그런데 마지막이 이렇다.

말도 없이 가버려 서운하다"고 했다.

그는 그러면서 박씨가 냈던 보증금 500만원으로 '정리'에 드는 비용을 정산하고 남은 돈을 박씨의 남동생에게 주기로 했다고 귀띔했다.

세 모녀가 떠난 자리는 초라했다.

집 구석구석에 먼지 덩어리가 굴렀고 낡고 뜯어진 벽지 사이로 콘크리트가 드러났다.

큰 방은 사람 셋이 누우면 딱 맞을 정도로 비좁았다.

작은 방엔 누렇게 변색한 구식 대형 컴퓨터 2대가 놓여 있었다.

인부 박모(50)씨는 "세 가족이 살았던 집치고는 짐이 너무 없다.

만화책만 많을 뿐 특히 옷가지가 적다"며 "가전제품들도 다 못쓰고 버려야 하는 것들"이라고 전했다.

단출한 살림살이는 이미 세상을 등진 세 모녀의 삶을 그대로 보여줬다.

냉장고 안에는 김치 등 반찬, 밥솥 안에는 밥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두 딸은 만화가를 꿈꿔온 듯 작은 방 벽장에 만화책이 즐비했고 직접 만화를 그린 연습장도 다수 발견됐다.

벽에 일본 연예인 포스터도 붙어 있었다.

달력에는 이달 19일을 '삼촌 생일'이라 적어둔 표시가 보였다.

대문 앞에 쌓인 짐들 사이로 큰 딸(35)과 작은 딸(32)의 초·중·고등학교 졸업장이 눈에 띄었다.

5∼6권의 앨범에 박씨 부부의 신혼 시절부터 두 딸의 성장과정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남편과 박씨, 두 딸이 환하게 웃는 단란했던 한때의 액자 사진도 인부들이 정리했다.

남편은 12년 전 방광암으로 숨졌고, 그 이후인 2005년 세 모녀가 이곳으로 이사 왔다고 한다.

구입한 과자의 이름, 감자 몇 알 정도까지 정갈한 글씨로 꼼꼼히 쓴 가계부가 눈길을 끌었다.

임씨는 "딸들이 이웃하고는 왕래가 적었지만, 친구들과는 친분이 두터웠던 것 같다"며 "어제 늦은 밤까지 딸 친구들이 집을 둘러보고 울음을 터트렸다"고 전했다.

세 모녀는 지난 26일 오전 8시 30분께 집안에서 숨진 채 발견됐고 이들 옆엔 타다 남은 번개탄이 있었다.

주인 임씨 부부는 "일주일째 집안에서 인기척 없이 TV 소리가 이어져 빈집에 불이 날까 봐 걱정돼 경찰에 신고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경찰은 현장에서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라고 쓴 봉투와 현금 70만원이 발견된 점으로 미뤄 생활고를 비관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두 딸은 카드빚으로 신용불량 상태였고, 생계를 책임지던 박씨는 한 달 전 다쳐 일을 그만뒀다.

큰딸은 고혈압에 당뇨까지 앓고 있었다.

박씨의 남동생은 "최근까지도 수시로 연락하면서 지냈다"며 "도움을 주려고 해도 누나가 괜찮다며 사양했는데 이런 일이 생겼다"며 울음을 삼켰다.

이들의 시신은 경찰병원에 안치됐다.

유족들은 빈소를 차리지 않고 바로 발인했다.

언론보도로 이들의 사연을 접한 송파구청 측은 병원에서 유족들을 만나 장례 지원절차를 논의했다.

구청 관계자는 "박씨 모녀가 기초생활수급자나 차상위계층으로 수급 신청을 한 적이 없기 때문에 구청에서 직접 나설 수는 없다"며 "이들을 돕겠다고 나선 교회가 있어 교회와 연계해 장제비용을 지원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날 오후 2시 박씨의 남동생 등 유족과 친지들은 침통한 표정으로 아무 말 없이 영구차에 올랐다.

세 모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한 이는 10여 명이 전부였다.

(서울연합뉴스) 김연숙 기자 nomad@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