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이나 고위 공직자들이 연루된 뇌물수수 사건에 대해 법원이 신중한 판단을 내리고 있다. 결정적인 증거가 “뇌물을 건넸다”는 진술뿐인 사건에서 진술의 신빙성이 의심되면 유죄로 보기 힘들다는 입장이다. 설익은 기소나 상황에 따라 오락가락하는 진술만으로 공직·정치 생명을 끊지는 않겠다는 취지로 해석된다. 대법원은 반면 공직자가 업무와 관련해 맺은 성행위, 관할 업체 관계자에게 받은 결혼식 축의금 등은 판결을 통해 뇌물 사례로 확정한 바 있다.

박영준 前차관 '원전 뇌물' 대부분 무죄

○이어지는 뇌물수수 ‘무죄’

부산지법 동부지원 형사1부(부장판사 김문관)는 20일 이명박 정부 시절 ‘왕(王) 차관’으로 불렸던 박영준 전 지식경제부 차관에 대해 뇌물혐의의 대부분을 무죄로 판단했다.

재판부는 박 전 차관의 전체 범죄 액수인 5700만원 중 87.7%인 5000만원에 대한 혐의를 무죄로 봤다. 박 전 차관이 2010년 3월29일 오후 9시46분 이후 서울 강남의 한 호텔에서 여당 고위 당직자 출신 이윤영 씨에게서 아랍에미리트(UAE) 원전 관련 청탁을 받고 5000만원을 챙긴 혐의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재판부는 “3월29일은 박 전 차관이 청와대에서 열린 콩고 대통령 국빈 만찬에 참석한 날인데 ‘정확한 약속 시간도 정하지 않고 1시간30분가량 무작정 기다렸다’는 이씨의 진술을 납득하기 어렵다”며 “이씨가 처음에는 ‘5만원권으로 전달했다’고 했다가 나중에 ‘1만원권’이라고 번복해 진술을 믿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다만 박 전 차관이 2010년 10월~2011년 4월 김종신 전 한국수력원자력 사장에게서 원전 관련 정책 수립 청탁을 받고 700만원을 받은 혐의만 “진술에 일관성이 있다”며 유죄로 인정, 징역 6월을 선고했다. 박 전 차관은 서울 양재동 파이시티 인허가 청탁과 관련, 대법원에서 지난해 9월 징역 2년 형을 확정받았다.

대법원은 앞서 저축은행에서 뇌물을 받은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김광수 전 금융정보분석원장과 이철규 전 경기경찰청장 등에 대해 지난해 잇따라 무죄 확정 판결을 내렸다.

○검찰 “직접 증거 없어 입증 어려워”

사법부는 진술의 일관성·신빙성·명확성에 기초해 혐의 중 일부를 무죄로 보거나 무죄 확정판결을 내리고 있다. 대법원은 지난해 4월 김두우 전 청와대 홍보수석에 대해 “김 전 수석에게 뇌물을 건넸다던 A씨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악의적으로 김 전 수석을 모함하려고 말을 꾸며낸 것 같다”고 무죄를 판결했다.

이성헌 전 새누리당 의원, 이석현 민주당 의원도 항소심에서 진술의 신빙성 문제로 잇따라 무죄를 선고받았다. 검찰은 지난달 9일 이 전 의원에 대한 상고 포기 당시 “범죄 사실을 입증할 직접적인 증거가 없는 어려운 사건”이라고 토로하기도 했다.

한 대형 로펌 변호사는 “뇌물 사건의 결정타는 누구한테 돈을 줬는지 깨알같이 적어놓은 수첩 아니면 진술”이라며 “요즘은 수첩 같은 물적 증거까지 조작됐을 가능성을 재판부가 염두에 두고 판단해 입증이 어렵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대형 로펌 변호사는 “정치인이나 고위 공직자에 대한 기소는 그 자체로도 실적으로 인정받는 분위기가 검찰 내부에 있는 것이 사실”이라며 “검찰이 고민하지 않으면 비슷한 사례가 계속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김선주 기자 sak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