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 스토리 - 민주당 을지로위원회] 법적 다툼 끝난 것도 "재협상하라"…을지로위원회의 '기업정치'
지난 9월12일 서울 KT 광화문 사옥. 민주당 을지로위원회가 KT 경영진을 소집했다. KT가 대리점에 지급해야 할 수수료 중 일부를 주지 않았다는 대리점주들의 주장을 따지기 위한 것이었다. 간간이 “이석채 회장이 직접 나오라”는 목소리도 간담회장 밖으로 흘러나왔다. 그러나 이 건은 이미 소송에서 대리점주의 주장이 무리라는 게 드러난 사안이다. 현장에 참석한 사람들은 청문회와 같은 고압적 분위기가 이어졌다고 전했다.

○“을지로위원회가 ‘슈퍼 갑’”

‘을을 지키는 길(路)’이라는 뜻을 가진 민주당 의원 모임인 을지로위원회는 6개월 전인 지난 5월10일 출범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본사와 대리점 등 이른바 ‘갑을 관계’에서 발생하는 불공정거래를 바로잡는다는 것이 을지로위원회의 활동 취지다.

하지만 을지로위원회가 다녀간 기업 관계자들은 “을을 위한다는 을지로위원회가 ‘슈퍼 갑’ 행세를 한다”고 입을 모은다. 한 관계자는 “국회의원 10여명이 회사에 찾아와 범죄자 취급하듯이 다그치며 회사 자료를 내놓으라고 하는 것에 큰 부담을 느낀다”고 말했다. 국정감사와 청문회 카드로 압박하는 것은 다반사다. 지난달 20일 을지로위원회와 롯데그룹 사장단 간 간담회에서 김기식 의원은 “롯데는 불공정거래 백화점으로 별도의 청문회를 열어야 한다”고 압박하며 “골목상권 침탈을 당장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롯데백화점도 의무휴업을 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지난달 을지로위원회와 만난 한 기업 임원은 “기업의 경영 상황을 일일이 국회의원에게 보고하고 야단을 맞고 있다는 사실이 매우 당혹스러웠다”고 말했다. 을지로위원회가 KT 롯데그룹과 구성한 상생협력위원회도 ‘갑을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회의원과 기업이 대등한 위치에서 대화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점에서다.

○법적 다툼 끝난 일도 재협상

을지로위원회가 갑을 간 분쟁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법과 제도를 우회해 ‘정서법’에 기초한 조치를 내리는 것 역시 문제로 지적된다. 한 편의점 본사는 계약 만료를 3년 이상 남겨둔 가맹점주와 계약을 해지할 때 3개월치 가맹수수료만 중도해지 위약금으로 받기로 했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제시한 가이드라인상으로는 6개월치 가맹수수료를 위약금으로 받을 수 있지만 을지로위원회의 요구에 따라 돈을 절반만 받았다.

을지로위원회는 최근 대리점주들과 소송을 벌이고 있는 한 기업에 소송에서 져도 대법원에 상고하지 말라는 요구를 했다. 대법원에 상고하면 재판 기간이 길어져 대리점주들의 피해가 커진다는 것이 이유였다. 헌법으로 보장된 3심제를 부정하는 요구였다. 한 통신사 관계자는 “법적으로 마무리된 사안에 대해서도 다시 협상하라고 하고 있다”며 “이런 요구를 다 들어주고 대리점 운영을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을지로위원회 소속 국회의원들이 발의한 ‘을 살리기 법안’이 낳을 부작용도 우려된다. 을지로위원회 소속 이언주 의원이 대표 발의한 ‘유통산업발전법 개정안’은 대형마트와 제휴해 무 배추 등을 공급받는 중소형 슈퍼마켓이 월 2회 의무적으로 휴업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대기업에서 납품을 받는다는 이유로 중소 유통업체까지 영업규제 대상에 포함한 것이어서 논란을 낳고 있다. 이종걸 의원이 대표 발의한 ‘대리점 거래의 공정화에 관한 법률’도 마찬가지다. 본사의 불공정 행위로 대리점이 손해를 입었을 때 손해액의 최대 3배까지 징벌적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본사는 당연히 대리점을 줄이고 직영점을 늘려 결국 대리점이 피해를 입을 것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불공정 관행 공론화 긍정적 역할

을지로위원회가 다양한 불공정거래 관행을 공론화하고 처우가 열악한 근로자들의 근무 여건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점은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을이 억울하게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한다면 이런 문제를 공론화하고 어떤 식으로든 해결하는 것이 정치인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을지로위원회가 갑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는 ‘블랙 을’을 제어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을지로위원회는 롯데마트와 매장 철수 문제를 놓고 갈등을 빚은 한 인테리어 시공업체 대표의 사례를 접수했으나 중재에 나서지 않기로 했다. 갑보다는 을에 더 문제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롯데마트 관계자는 “대기업 입장에서도 일부 협력사의 부당한 요구에 대해 소명할 기회를 갖게 된 것은 긍정적인 면”이라고 말했다.

유승호/양준영 기자 ush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