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망연자실 > 환헤지 통화옵션 상품인 키코(KIKO) 피해 기업 관계자들이 26일 서울 서초동 대법원에서 전원합의체 상고심 선고가 끝난 뒤 굳은 표정으로 법원을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 망연자실 > 환헤지 통화옵션 상품인 키코(KIKO) 피해 기업 관계자들이 26일 서울 서초동 대법원에서 전원합의체 상고심 선고가 끝난 뒤 굳은 표정으로 법원을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대법원이 5년여간 이어진 키코(KIKO) 소송에서 은행 측의 손을 들어줬다. 법조계는 “상품 설계·계약이 일방적으로 불공정하게 이뤄지지 않았다고 판단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이번 판결로 현재 법원에 계류 중인 270여건의 관련 소송에서도 피해 기업들이 불리한 입장에 놓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일부 사건에선 은행 측이 설명해준 정도 등에 따라 부분적으로 배상받을 수도 있다.

◆“불공정한 상품으로 볼 수 없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재판장 양승태 대법원장)는 26일 수산중공업 등 키코 피해 기업들이 시중은행을 상대로 낸 부당이득금 반환소송 4건에 대한 선고를 내리기 전 논란이 됐던 쟁점부터 정리했다.

키코 상품이 환헤지에 부적합한 상품인지 여부에 대해서는 환헤지 목적에 부합한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환헤지는 현재 시점과 장래 환율을 고정함으로써 외환 거래의 위험을 줄이기 위한 것”이라며 “환율이 올랐을 경우 손실이 발생하지만 보유 외환에서는 이득이 발생하므로 손실만 생겼다고 볼 수 없다”며 이같이 설명했다.

키코 계약의 불공정 여부에 대해서는 “어떤 계약이 불공정한지는 계약 시점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며 “향후 외부환경 급변에 따라 일방에 큰 손실이, 상대방에 상응하는 이익이 발생하는 구조라고 해서 계약이 불공정하다고 볼 수는 없다”고 판시했다.

은행이 판매 이익금이나 수수료, 마이너스 시장가치를 고지할 의무에 대해서도 인정하지 않았다. 대법원은 “일반적인 거래에서 용역의 판매자가 구매자에게 판매 이익금을 알려줄 의무가 없고, 은행이 거래 때 일정 이익을 추구하려는 것은 시장경제 속성상 당연하다”고 밝혔다.

다만 고객이 위험을 정확하게 알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할 신의원칙상 주의 의무는 있다는 게 대법원 입장이다. 대법원은 “기업 경영 상황에 과대한 위험을 초래하는 통화옵션 계약을 적극 권유해 체결하는 것은 적법성 의무를 위반해 불법행위”라고 설명했다.

다른 270여건 소송 잣대될 듯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쟁점 정리를 토대로 수산중공업이 우리·씨티은행을 상대로 낸 사건과 세신정밀이 스탠다드차타드(SC)은행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각각 원고 패소 및 원고 일부 승소한 원심을 확정했다. 반면 2심에서 원고 패소 판정이 나왔던 삼코 사건은 일부 승소 취지로,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받았던 모나미 사건에 대해서는 일부 패소 취지로 사건을 파기 환송했다.

이같이 기업별로 결과가 엇갈린 것은 은행의 설명의무 위반 여부에 따라 판단 기준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삼코의 경우 은행 측이 회사의 과거 외화유입액 등 여러 가지 경영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수출 실적만으로 “환헤지가 필요하다”고 상품 가입을 권유해 적합성 원칙에 어긋났다는 게 대법원 판단이다.

반면 패소 취지로 파기 환송된 모나미의 경우 “여러 건을 추가 가입한 원고의 투자 형태로 볼 때 환헤지가 아닌 환투자에 해당하고 위험성도 알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며 “은행 측이 설명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볼 수 없다”고 밝혔다.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쟁점 정리를 기준으로 이날 4건에 대해 최종 선고하면서 남은 키코 관련 소송에도 잣대로 작용할 전망이다. 키코 관련 소송은 현재 1심 167건, 2심 68건, 대법원 41건 등이 계류돼 있다.

■ 키코(KIKO)

구매자인 기업과 판매자인 은행이 외화를 사고팔 권리(옵션)를 각각 갖는 파생상품이다. 기업은 원화값이 일정 범위 안에서 움직이면 이익을 얻지만 원화값이 일정한 범위를 벗어나면 큰 손해를 보게 돼 있다.

정소람 기자 ra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