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오전 9시께 잠시 비가 그쳐 덥고 습한 공기가 가득한 서울 서초동 대법원 법정 앞에는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고엽제 전우회 승합차 10여대가 나란히 섰다.

1960~1970년대 베트남전에 파병됐다가 고엽제로 폐암 등 각종 질병을 앓게 됐다며 미국의 고엽제 제조사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내 상고심을 방청하러 온 사건 당사자들이었다.

100여명의 전우회 회원들은 신형 군복 바지와 파란색 티셔츠를 맞춰 입고 오전 10시 30분으로 예정된 판결 선고 시간 한참 전부터 긴장한 표정으로 법정 앞을 서성거렸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한 대법원 청사 방호원 20여명이 법정 안팎에서 삼엄한 경계를 펼쳤다.

오전 10시부터 다른 사건의 판결 선고가 시작돼 전우회 회원들은 방청권을 손에 든 채 법정 밖에 대기했다.

전우회 회원들 중 일부는 판결 예정 시간에 맞춰 법정에 들어갔고, 김신 대법관은 회원들 입장에서 아쉬운 판결 이유를 밝혔다.

김 대법관은 주문을 읽기 전에 "원고 측이 소송을 제기한 상태에서 상당한 기간이 지났다.

그동안 변론을 준비하고 치열한 공방을 벌여온 쌍방 당사자에게 경의를 표한다"고 운을 뗐다.

염소성 여드름 질환자 39명에 대한 고엽제 제조사의 배상 책임만 인정했다고 밝힌 김 대법관은 "딱한 사정만으로 판결할 수는 없었다"며 법리적 판단과 별개의 안타까운 심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김성욱 대한민국고엽제전우회 사무총장은 판결 선고 직후 "대법원이 사건을 7년 동안이나 방치한 것이 오늘 선고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싶다.

우리 (사법) 주권을 포기했다고 생각한다"고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전우회 회원들은 우려했던 소란을 피우지 않고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 두 세명씩 우산을 쓰고 종종걸음으로 금세 흩어졌다.

구호를 외치거나 큰 소리를 내는 사람도 없었다.

1966년부터 1년 동안 월남전에 참전한 뒤 당뇨병으로 고생했다는 김수근(69)씨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

그동안 얼마나 아팠었는데…"라며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자리를 떴다.

(서울연합뉴스) 한지훈 기자 hanjh@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