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이크 없는 의회 권력] "입법 취지 제대로 몰라 황당 발언…失笑 참으며 면전에선 맞는 말씀"
“우리는 죽어라 공부하는 학생이고 그들은 채점만 하는 빨간펜 교사죠.”

한 경제부처 국장은 국회의원들을 이렇게 묘사했다. 정부가 법률 초안을 가져가면 의원들이 조금만 수정해서 법안을 발의하는 게 매우 많다는 이유에서다. 그는 “의원들이 고치고 싶은 항목 몇 개만 고쳐 의원입법 형태로 제출하지만 알고 보면 정부 부처에서 만들어 준 게 대부분”이라고 전했다.

의원들의 전문성이 결여된 탓에 빚어지는 현상이다. 그는 “입법 취지조차 제대로 숙지하지 못한 의원들이 황당한 얘기를 할 때면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아야 할 때도 있다”고 털어놨다.

그래도 면전에선 본심을 드러낼 수 없는 노릇이다. 차관급 이하인 국·과장급은 국회의원에게 “그게 아니고요”라는 토를 달 수 없다는 게 정부 관료들 사이에선 불문율이다. 그는 “실소를 금치 못할 얘기를 해도 무조건 ‘물론 의원님이 말씀하신 부분도 맞지만’이라는 말로 시작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한 전직 의원도 “국회의원 4년 임기 동안 국회 도서관 근처 한 번 가지 않고 법전 한 번 들여다보지 않은 채 법안을 발의하는 동료 의원들을 보고 많아 놀랐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공부 좀 해야 할 텐데’란 생각이 들게 하는 의원들이 법률 조항을 마음대로 바꾸는 장면을 접할 때면 의원 수를 줄여야 한다는 주장에 공감하게 된다”고 했다.

법안을 무더기로 발의하고 법률 문구를 임의로 수정하는 세태를 막을 수 있는 대안으로 ‘입법 실명제’가 꼽힌다. 현재는 어느 의원이 발의했다는 정도의 내용만 남아 있지 누가 어떤 부분을 왜 고치고 뺐는지 등의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미국의 입법 사례를 참고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미국은 국가나 사회에 끼치는 영향력이 높은 법안을 통과시킬 때는 법을 만든 의원들의 실명을 법안 이름에 붙인다. 2010년 7월 발표한 ‘도드-프랭크법’이 대표적이다. 민주당 소속으로 법을 입안한 크리스토퍼 도드 전 상원의원과 바니 프랭크 전 하원의원의 성을 따왔다. 두 의원은 2008년 발생한 금융위기가 재발하는 것을 막기 위해 부실 금융회사 정리절차를 개선하고 금융 감독을 강화하는 내용을 이 법에 담았다. 2002년 7월 분식회계로 파산한 ‘엔론사태’ 이후 만들어진 ‘사베인스-옥슬리법’도 마찬가지 경우다.

국내에서도 국회의 전문성을 강화하기 위해 2007년 11월 국회입법조사처를 설립했다. 의원들이 요구하는 법률 자료와 정책 현안을 조사하는 등 다양한 입법 활동을 지원하는 곳이다. 2007년 65명이었던 정원은 2011년 117명으로 4년 만에 80% 늘었다.

정무경 기획재정부 민생경제정책관은 “정부 공무원들은 순환보직이지만 입법조사처 직원들은 붙박이여서 국회의 입법 능력이 상당히 개선됐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뒤집어 보면 입법조사처의 역할이 커지면서 과잉 입법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는 지적도 없지 않다. 의원입법이 증가하면서 입법조사처는 비정규직을 대거 채용하는 방식으로 인력을 확충해왔다. 정규직을 늘리려면 국회 운영위원회의 허가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계약직 40명까지 포함하면 입법조사처의 직원 수는 이달 초 기준 157명이다. 작년 말에 비해 12명 늘었다.

한 고위 공무원은 “입법조사처 같은 지원기관들이 법을 곧잘 만들어주니 법안이 난립하는 측면이 있다”며 “미국처럼 정부가 주로 법안의 틀을 만들고, 국회는 법안 심의만 하는 식의 균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특별취재팀 : 산업부 이건호(팀장)·이태명·정인설 기자, 정치부 김재후·이호기·이태훈 기자, 경제부 김주완 기자, 지식사회부 양병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