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일 영면에 든 남덕우 전 국무총리에 대해 누구보다 애틋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공일 세계경제연구원 이사장과 강봉균 전 재정경제부 장관이다. ‘한강의 기적’을 함께 이끈 공동 주역으로서 고인과 각별한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이다.

사공 이사장은 1980년대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으로서 당시 무역협회장이던 고인과 함께 수출 강국의 청사진을 그렸다. 강 전 장관은 1970년대 중반 경제관료 시절 당시 남덕우 부총리를 도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했다.

사공일 세계경제연구원 이사장

사공일 세계경제연구원 이사장
사공일 세계경제연구원 이사장
남 전 총리는 평생 한국 경제 발전과 인생의 궤적을 함께하신 분이었습니다.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앞에 서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고, 마침내 찬란한 경제 부흥을 일궈내셨습니다. 며칠 전 뵈었을 때도 나라 걱정을 놓지 않으셨던 기억이 납니다. 평생 그렇게 살아오셨습니다.


고인을 인생의 대선배로 모시면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외유내강의 리더십을 아직 기억합니다. 모든 여건이 부족했던 개발연대에 경제 발전 기틀을 닦을 수 있었던 것은 고인의 남다른 리더십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사람을 만나 설득과 대화를 하되, 꼭 해야 하는 일은 뜻을 굽히지 않으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경제부총리가 돼야 하느냐’라고 묻는다면 예나 지금이나 고인을 귀감으로 꼽을 것입니다.


한국은 수출로 일어선 나라입니다. 급성장한 교역의 밑바탕엔 고인의 노력이 있었습니다. 1980년대 중반 고인이 무역협회장을 맡던 시절, 서울 강남구에 무역센터를 건립하자며 각계를 설득하셨던 일을 기억합니다.

당시 대통령 경제수석비서관이었던 저는 그 열정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1988년 세워진 무역센터는 수출 강국 한국의 나아갈 길을 보여주는 귀중한 상징물이 됐습니다.

고인이 떠나신 지금, 우리는 아직 수많은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수출 여건이 어렵고 성장은 벽에 부딪혔습니다. 정부는 기업들이 더 성장해 나갈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어주고, 기업은 스스로 경쟁력을 갖춰 가야 합니다.

고인은 늘 미래를 준비하신 분이었습니다. 1980년대 정보기술(IT)의 진보를 예견하며 컴퓨터를 누구보다 빨리 익히셨습니다. 국내 관료들 중 워드프로세서를 능숙하게 활용하신 첫 번째 인물일 겁니다. 새로운 것을 늘 익히려고 노력하셨고, 후학 양성에도 적극적이셨습니다.

최근까지도 선진화포럼을 통해 특유의 아이디어와 혜안을 펼쳐 놓으셨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언제나 진취적이며 열정적이었던 그 삶을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

강봉균 전 재정경제부 장관

강봉균 전 재정경제부 장관
강봉균 전 재정경제부 장관
고인(故人)은 학자 출신이자 경제 관료로서 우리 경제에 많은 업적을 남기셨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우리나라 경제체제를 자유시장 경제로 잡아주신 분입니다. 당시는 이른바 ‘군사정권’ 시절로, 정부가 해야 할 일과 시장이나 기업이 해야 할 일이 뚜렷이 정해져 있지 않았습니다.

그때 고인은 ‘정부는 기업이 잘되도록 뒷받침해줘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계셨고 우리 경제가 그런 방향으로 갈 수 있는 기반을 다지셨습니다. 저는 이것이 고인이 후배 관료들에게 남긴 가장 큰 유산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고인은 누구보다 치우침이 없는 분이셨습니다. 특정 지역을 위한다거나, 어떤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일을 처리하지 않았습니다. 부총리 자격으로 경제장관회의를 주재할 때 여러 장관들의 의견이 잘 맞지 않아도 절대 언성을 높이지 않고 차분히 설득하시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1960년대 장기영 전 부총리가 ‘불도저’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밀어붙이는 스타일이었던 데 비해 고인은 전혀 그런 면모를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고인과 오래 일해보지는 않았지만 ‘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만들면서 일찍이 고인의 탁월함과 선견지명을 느낀 적이 있습니다. 1975~1976년 일입니다. 당시 저는 경제기획원 과장으로 4차 5개년 계획을 작성하고 있었습니다. 저를 포함해 상당수 실무진들은 ‘이제 경제개발만 해서는 안된다. 사회개발도 같이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소득 분배도 중요하다’는 점과 ‘환경·노동 문제도 등한시해선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는 웬만한 국장급 이상 간부들이 그런 문제의식에 대해 ‘쓸데 없는 소리 말라’며 손사래를 치던 때였습니다. 정부 차원에서 중화학공업 드라이브를 걸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인은 이런 가운데 실무 과장들의 문제의식을 받아들이셨습니다.

4차 5개년 계획부터 우리나라 ‘경제사회발전 5개년 계획’을 추진하게 된 데는 고인의 역할이 컸습니다. 고인을 기리며 삼가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