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조영남 기자 jope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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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부터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 거세게 일었다. 불평등, 빈곤, 실업 등에 대한 비판이었다. 이 시기에 시장경제는 야만적이고 사유재산이 철폐된 사회주의만이 문명사회라고 주장하면서 사회 진화를 통해 문명화된 사회주의가 도래할 것이라고 주장한 인물이 미국 사회철학자 소스타인 베블런(Thorstein Veblen)이다.

소스타인 베블런
소스타인 베블런
노르웨이 이민 가정에서 태어난 베블런은 경제학뿐만 아니라 인류학 윤리학 생물학 등 다양한 사상을 섭렵한 뒤 자본주의를 맹렬히 비판했다. 그래서 그를 ‘미국의 마르크스’라고도 부른다.

베블런 사상은 인간에겐 창조적이고 생산적 노력을 뜻하는 ‘제작 본능’이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이 본능이 가장 잘 구현된 사회가 사유재산이 없던 원시사회였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원시인들은 계급 없이 생산 활동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그룹후생을 위해 경쟁적으로 헌신했다고 주장한다.

그같이 이상적인 사회를 왜곡하고 오염시킨 역사가 인류역사라고 베블런은 개탄한다. 그 원인이 사유재산의 등장이라는 것이다. 사유재산 제도가 인정되면서 땀 흘려 일하기보다 강탈과 침략을 통한 전리품의 형태로 재산을 축적하는 약탈문화가 생겨났다고 한다. 게다가 용맹과 힘의 우월성이라는 이유로 재산 축적에 성공한 사람들은 상류계급으로 존중받았고 노동과 땀은 천시됐다는 게 그의 분석이다.

베블런은 오늘날 자본주의도 약탈문화의 범주에서 벗어난 게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웃과 경쟁을 통한 이윤추구는 생산적인 노력이 아니라 힘의 논리와 광고 선전 등에 의한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약탈적 본능’의 결과물이 부(富)라는 얘기다. 그래서 산업자본주의는 야만적 진화의 한 형태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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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블런이 주목한 것은 유한계급의 등장이다. 유한계급은 사회 상류층에 속하면서 경영 법률 정치 스포츠 종교 등 비생산적 활동에 종사하는 돈 많은 사람들을 말한다. 노동자 기술자 등 직접 생산 활동에 종사하는 계층은 하류층으로 분류했다. 유한계급 앞에서 노동은 천시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재산권의 인정으로 약탈문화가 시작될 때부터 존속했고 자본주의에서 그 의미가 완성됐다는 유한계급에 대한 베블런의 비판은 혹독하다. 스포츠와 종교는 유한계급의 야만적 지배욕을 강화한다는 이유로 철저히 배격한다. 교회 종교의식 등은 물질적 생산에도 기여하지 못하고 과시적 낭비로서 공동체의 효율을 제약할 뿐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스포츠에 대한 탐닉은 인간의 도덕적 성품의 개발을 방해한다고 말한다.

유한계급에 속하는 부자의 소비에 대한 베블런의 고발이 흥미롭다. 부자는 자기가 강자이고 부자임을 알리려고 끊임없이 소비하는데 그런 소비행동은 과시소비라고 비꼰다. 비싼 것을 소비해 부를 과시한다는 얘기다. 사치도 약탈적 성격을 가진 부자의 자기과시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우월성을 보여주기 위한 부의 축적과 과시소비를 부추겨 자원을 낭비하는 체제라는 게 베블런의 결론이다. 자본주의에서 생산·소비되는 것의 절반은 낭비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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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을 끄는 것은 계급갈등에 대한 그의 인식이다. 자본주의에는 두 가지 적대적 세력이 있는데, 하나는 생산과 직접 관련된 노동자, 기술자 등의 산업계급이고 다른 하나는 금전적인 이윤을 추구하는 경영계급이다. 후자는 경영자 자본가 법률가 등 비생산적 계급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사회의 번영이나 효율적 생산에 관심이 없고 이윤추구에만 급급할 뿐이라고 한다.

자본주의에서는 경영계급이 산업계급을 지배한다는 게 베블런의 인식이다. 실업 사치 자원낭비 등은 그런 지배의 필연적 결과라고 한다. 따라서 경영계급의 무분별한 태도에 격분한 산업계급이 경영자를 몰아내고 정치와 경제를 지배하는 사회주의가 도래할 거라고 예측했다. 이윤추구를 위한 생산 감축도, 소비를 부추기는 광고도, 실업도 없는 번영한 사회가 올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노동자와 기술자는 사적 이윤을 추구하지 않을 것이라는 베블런의 생각은 순박한 것이었다. 노력에 대한 보상 없는 사회주의에서는 제작 본능도 사라진다는 것을 간과했다. 게다가 자원이용을 계산할 가격이 없기에 계획경제는 불가능하다는 걸 인식하지 못했다.

베블런은 유한계급의 근원적인 것을 보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는다. 부자들이 투자자본의 원천이라는 걸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신기술 투자와 생산, 일자리 창출을 위한 자본을 제공하는 자가 부자다. 부자의 저축 없이는 경제를 확장시킬 자금도 없다. 소비로는 생산을 증대시키지 못한다는 점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고등교육 도서관 화랑 자선단체 등을 위한 기부금도 여유자금이 있어야 가능하다.

미국 영국 독일 등이 보여주듯 세금도 부유층이 대부분 부담한다. 자동차처럼 사치품을 필수품으로 전환시킨 것도 부유층 때문에 가능하다. 부자를 싸잡아 유한계급이라고 경멸한 베블런의 논리가 갖가지 한계점을 갖고 있다는 지적은 그래서 나온다.

미국은 자본주의 힘으로 번영의 길을 걸었다. 1인당 소득이 1920년엔 8000달러로 성장했고 냉장고, 전화, 수세식 화장실, 수돗물, 자동차까지도 이용하는 등 미국인들의 생활수준은 크게 향상됐다. 그럼에도 베블런이 자본주의 저력을 인정하지 않았던 건 안타까운 일이다.


베블런 사상의 힘 막스 베버와 세기적 종교논쟁

상업사회는 낭비·탐욕·난폭을 특징으로 한다는 베블런의 주장과 달리 원시사회의 야만적이고 척박한 삶을 극복하고 자유와 번영을 누리는 문명사회를 가능하게 했다는 게 자유주의의 인식이다. 상업이야말로 인간의 약탈적 행동을 중단시킨 결정적 요인이라는 논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런 자유주의에 입각해 적게 통치하는 정부가 좋은 정부라는 토머스 제퍼슨의 자유사상이 미국을 지배하고 있던 시기에 등장한 베블런의 반자본주의 사상이 지성사에 미친 영향은 간과할 수 없다.

베블런은 칼 마르크스와 대결해 그 힘을 과시한다. 자본가와 노동자의 계급 갈등 없이도 망한 나라가 많다는 이유를 들어 마르크스는 이념의 진화적 선별과정에서 실패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빈곤과 삶의 불만이 누적되면 사회주의 혁명이 필연적이라는 교리는 틀렸다는 게 베블런의 인식이다. 가진 자와 못가진 자로 세상을 나눌 수도 없다고 주장한다. 그 대신에 엔지니어 계급과 경영계급으로 구분한다.

그러나 베블런의 이분법도 신빙성이 없다는 게 일반적 해석이다. 현대 자본주의에서 대부분의 기업총수는 엔지니어 출신이 상당하다는 지적이다. 그래서 기술전문가가 세상을 지배하리라는 그의 예측도 빗나갔다. 흥미롭게도 베블런은 종교는 번영의 장애물이요, 과시적 낭비일 뿐이라는 논리로 근로와 절약의 윤리를 강화해 자본주의의 번영을 촉진한 게 개신교라고 주장한 독일의 유명한 경제사회학자 막스 베버와 세기적 대결을 벌였다.

베블런의 사상은 우리 시대 가장 위대한 천재였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경제관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베블런의 사상에 매혹된 아인슈타인은 사회주의자가 돼 반자본주의에 앞장서 이윤을 위한 생산체제인 자본주의를 ‘사용’을 생산목적으로 하는 사회주의로 교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천재적인 과학자의 지적 능력은 이상사회도 계획해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베블런의 사상은 미국의 유명한 존 듀이 등을 중심으로 한 20세기 초의 ‘진보주의’ 운동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이 운동의 목적은 전문기술자가 경제와 사회를 계획·관리·통제하는 체제의 실현이다. 그 운동과 함께 베블런의 사상이 꽃을 피운 건 간섭과 규제를 내용으로 하는 루스벨트 행정부의 뉴딜 정책이라는 것도 흥미롭다.

효율에 초점을 맞춘 ‘과학적 경영’이라는 테일러리즘도 엄격한 규제와 질서가 번영을 가져온다는 베블런의 엔지니어 사상에서 영향을 받아 기업경영에 적용한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엔지니어가 사회를 계획·관리해야"…美 뉴딜 정책에 영향
베블런은 경제학 사회학 인류학 심리학 등 학제를 융합해서 얻은 새로운 생각과 변이, 자연도태, 유전이라는 다윈의 진화원리를 기초로 한 20세기 진화경제학의 등장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평가다.

민경국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