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헌 기자 dhch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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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응수라는 사람을 제대로 된 목수로 만들어준 게 바로 숭례문이에요. 돈을 벌기 위해 목수일을 시작했지만 1962년 스승님을 따라 숭례문 중수작업에 참여하면서 ‘이 길이 내 길이다’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죠. 50여년 만에 도편수(궁궐 사찰 등을 짓는 목조 건축의 총감독)가 돼 숭례문을 복구할 수 있다니…. 제 목수 인생에서 가장 뿌듯했던 순간입니다.”

[한경과 맛있는 만남] 숭례문복구 지휘 신응수 대목장 "같은 적송 씨로 키워도 풍파 겪어야 좋은 나무로 자라"
국내 목재 문화재 복원·복구 현장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사람이 있다. 중요 무형문화재 74호 신응수 대목장(大木匠)이다. 대한제국 시대 창덕궁 대조전과 희정당을 복원한 최원식 선생으로부터 조원재 이광규로 계승된 전통 건축의 명맥을 잇는 인물이다. 최근 복구를 끝낸 숭례문을 비롯해 광화문, 수원 화성 장안문, 청와대 상춘재와 대통령 관저, 경주 안압지 임해전, 고 이병철 삼성 회장의 이태원 승지원 등이 그의 손을 거쳤다.

숭례문 복구 기념식 이틀 뒤인 지난 6일 낮 서울 낙원동의 일식집 배수사에서 신 대목장을 만났다. 배수사는 그가 10년 넘게 다닌 단골집이다. 충북 청원 출신인 그가 횟집에서 만나자고 한 까닭이 궁금했다.

“어렸을 적에는 내륙 지역에 살다 보니 회를 먹을 기회가 거의 없었어요. 1970년 불국사 복원공사를 할 때였을 겁니다. 작업이 없는 날, 목수들끼리 경주 황성공원에 나갔더니 손수레에 멍게를 싣고 다니며 팔았어요. 처음에는 이런 걸 무슨 맛으로 먹나 싶었는데 먹다 보니 그 맛이 기가 막히더라고요. 이 집은 다른 곳보다 회가 맛있어 자주 옵니다. 회를 해삼내장젓갈에 찍어 먹으면 감칠맛이 기가 막혀요.”

그를 따라 광어지느러미회를 노란 빛깔의 해삼내장젓갈에 찍어 몇 번 씹으니 단맛이 진하게 느껴졌다. 신 대목장은 숭례문 복구 기념식이 끝나고 함께 작업한 목수 20여명과 함께 오후 4시30분부터 밤늦게까지 뒤풀이를 벌였다. 많은 시민이 찾아와 기뻐하는 것을 보고 뿌듯했지만 2008년 2월 화재 당시의 슬픔도 떠올라 모임을 가졌다고 한다.

“2008년 2월 숭례문에 불이 났을 때 북한산에 올라갔다 내려와 지인들과 술자리를 갖고 있었어요. 연락을 받고 바로 달려갔는데…(침묵). 숭례문 상층부 안쪽에 불이 붙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소리도 지르고 했는데 전달이 잘 안 됐어요. 비극적인 일이었죠.”

그가 숭례문에 남다른 애착을 갖고 있는 것은 1962년 조원재 선생을 따라 중수공사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신 대목장은 “숭례문이 내 인생을 바꿔놨다”고 말했다. 그전까지 생계를 위해 목수일을 했지만 숭례문 공사 이후 목수로서의 삶을 살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했다.

“책도 더 찾아보게 되고, 버스를 타고 가다가도 한옥이 보이면 내려서 이 건물은 어떻게 지었나 보고 그랬어요. 그저께 준공식 때 박근혜 대통령이 악수를 청하며 수고했다고 말하는데 울컥했지요.”

숭례문 복구 과정은 철저히 전통 방식으로 진행됐다. 성곽에 들어간 돌은 석공들이 정과 망치를 이용해 다듬었다. 목수들은 전기톱이나 전기 대패를 쓰지 않고 수작업으로 나무를 베고 손질했다. 문루의 기와는 명맥만 남았던 조선기와를 재현했다. 공사 현장에 대장간을 만들어 작은 못 하나까지도 직접 만들었다.

장인들은 상징적인 의미로 여름이나 겨울이나 전통 복식을 입고 작업에 나섰다. 이것도 신 대목장의 아이디어였다. “1962년 중수공사 당시의 숭례문을 복구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 만들어졌을 때의 숭례문을 복구하기 위해 이같이 제안했다”고 그는 설명했다. 화마가 숭례문을 할퀴었지만 다행히 기둥을 비롯한 목재는 대부분 살아남았다.

“문루 상층부는 많이 소실됐지만 하층부의 90%는 예전 나무를 그대로 활용했어요. 그래서 복원이 아니라 복구라고 했던 겁니다. 복원은 없어진 걸 다시 만드는 거예요. 위층도 불에 탄 부분을 잘라내고 다른 나무를 잇는 방식으로 최대한 기존 재료를 남겼어요. 화재를 잊지 말자는 의미로 일부는 단청을 칠하지 않고 그을린 부분을 놔두기도 했고요.”

복구된 숭례문에는 방재 장비가 대거 설치됐다. 광센서로 작동하는 화재감지기를 건물 전체에 달았고 곳곳에 스프링클러와 방수총 등 소화 장비를 갖췄다.

“경회루에도 했지만 나무에다 이런 걸 매달아 놓는다는 게 보기 싫지요. 불이란 게 한 번 붙기 시작하면 대단하거든요. 불이 나지 않도록 잘 지켜서 사전에 방지하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한경과 맛있는 만남] 숭례문복구 지휘 신응수 대목장 "같은 적송 씨로 키워도 풍파 겪어야 좋은 나무로 자라"
비어 있는 회접시가 나가고 튀김이 들어왔다. 대화 주제도 바꿔보기로 했다. 목공은 나무를 다루는 직업이다. 나무를 잘 다루는 것도 중요하지만 좋은 나무를 고르는 능력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신 대목장은 “좋은 나무를 잘 고르는 방법은 딱히 없다”며 “순전히 경험이 쌓이면서 생기는 능력”이라고 했다. 나무에 먹을 그어보고 잘라보며 최소한 10년은 해봐야 어떤 나무가 좋은지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신 대목장은 좋은 나무를 찾기 위해 평생 전국 곳곳을 돌아다녔다. 한때는 산림청 직원이 큰 소나무를 발견하면 ‘신응수 눈에 띄지 말아야 할 텐데’라고 걱정했다는 이야기까지 나왔다고 한다. 그는 “좋은 나무를 찾으려면 산림청의 협조가 절대적”이라며 “광화문 복원공사 때도 산림청 덕분에 좋은 나무를 쓸 수 있었다”고 말했다.

건물을 지을 때 가장 좋은 나무는 적송(赤松)이라고 한다. 나이테가 좁고 속은 노랗다 못해 붉은 빛을 띤다. 따로 품종이 있는 것은 아니고 강원 양양부터 경북 울진에 이르는 지역에서 자라는 소나무 가운데 품질이 좋은 나무를 적송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적송 씨앗이라고 나온 것을 뿌려도 자라고 나면 그냥 소나무인 경우가 많아요. 종자가 아니라 환경이 적송을 만들어요. 보통 적송은 바위가 많거나 지형이 나쁜 곳에서 더디게 자라요. 50년을 자란 일반 소나무와 100년을 자란 적송 크기가 비슷해요. 역경을 극복해야만 더 좋은 목재로 성장하지요.”

세간에 알려진 ‘금강송’이란 품종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신 대목장은 “선조들이 금강송으로 궁궐을 지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우리 문헌에 금강송이란 단어는 나오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2010년 11월 광화문 현판에 균열이 생겼을 때 항간에선 “신 대목장이 금강송을 쓰지 않아 균열이 일어났다”는 지적이 나왔다. 신 대목장은 과거 일본 학자가 한반도 지형을 6개로 나눠 그 가운데 하나에 금강형 소나무란 이름을 붙였는데 그것이 와전됐다고 설명했다.

"강릉에 소나무 숲 조성 … 고목 벨 땐 고사 지내"

나무에 대한 그의 애착은 남다르다. 오래된 나무를 벨 때 고사를 지내고 나무의 삶을 위로하는 축원을 한 후 도끼를 들고 ‘어명이오’를 세 번 외친 다음 나무를 자른다. 직접 나무를 키우기도 한다. 강릉 인근에 165만여㎡에 이르는 임야를 사들였다.

“지금 있는 소나무의 수령은 30~50년 정도 될 거예요. 100살은 돼야 나무를 쓸 수 있어요. 큰아들이 관리를 맡고 있는데 ‘네가 손자를 볼 때까지는 가능한 한 베지 말고 키워라’라고 했어요.”

신 대목장은 숭례문 광화문 등 국가문화재는 물론 청와대 상춘재, 대통령 관저 등과도 인연이 깊다. 그는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인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을 꼽았다. “정치적인 것은 잘 모른다”며 조심스레 운을 뗀 그는 “1961년 5·16이 일어나고 그 이듬해부터 전국적으로 문화재 복구 사업이 벌어졌다”고 회고했다. 불국사 복원 작업을 할 땐 박 전 대통령이 현장을 방문한 뒤 헬기를 타고 돌아가면서 건물의 단청 색상을 지적하기도 했고 세종대왕릉 성역화 작업, 강화도 고려궁지 복원 작업 등에도 직접 찾아와 금일봉을 주고 갔다고 한다.

반면 어떤 대통령은 청와대 내 한옥 수리 때문에 갔더니 “보기 싫은데 헐면 안 되겠느냐”고 말했다고 한다. 신 대목장은 “한옥은 우리나라의 전통 주거 방식인데 일부는 절을 먼저 떠올리며 종교적인 차원에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꼬집었다. 그 대통령이 누구냐고 거듭 물었지만 한사코 말하지 않았다.

숭례문 복구 작업을 끝냈지만 신 대목장은 여전히 바쁘다. 경복궁 소주방(燒廚房·궁궐 내 음식을 만들던 곳) 복원 작업이 2015년까지 계속되고 울산 태화루는 오는 30일 상량식을 연다. 이 공사는 내년 중순께 끝난다.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한국전통문화재단도 만들었다.

“숭례문 복구로 문화재에 대한 국민의 관심이 높아진 것 같아 다행이에요. 국민 모두가 자기가 주인이라는 생각으로 문화유산을 내 것 같이 아껴야 해요. 주인의식을 갖고 잘못된 점은 정부에 말할 수 있어야 하고요.

그래야 숭례문 화재와 같은 비극이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한경과 맛있는 만남] 숭례문복구 지휘 신응수 대목장 "같은 적송 씨로 키워도 풍파 겪어야 좋은 나무로 자라"

신응수 대목장의 단골집 배수사 횟감 8~10시간 숙성시켜 감칠맛 자랑

[한경과 맛있는 만남] 숭례문복구 지휘 신응수 대목장 "같은 적송 씨로 키워도 풍파 겪어야 좋은 나무로 자라"
서울 낙원동에서 30년 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일식 전문점이다.

회 초밥 튀김 구이 조림 등을 코스로 먹을 수 있는 점은 여느 일식집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생선을 바로 잡아 손님상에 올리지 않고 숙성한 뒤 내놓는 게 이 집의 특징이다.

생선 종류에 따라 8~10시간 정도 숙성 과정을 거친다. 활어회보다 쫄깃한 맛은 덜하지만 씹을수록 감칠맛이 배어 나온다. 회를 찍어 먹을 수 있도록 해삼내장젓갈을 주는 것도 독특하다.

회는 계절과 상황 등에 따라 매번 다르다. 코스 요리를 주문하면 참치 광어 도미 민어 등 10여가지 생선 가운데 5~6종류를 맛볼 수 있다. 배상남 사장이 매일 아침 시장에서 직접 생선을 고른다고 한다.

점심은 1인당 2만5000~3만5000원, 저녁은 5만~7만원. (02)764-7762

이승우 기자 leesw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