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 낮엔 현장으로…밤엔 기업·사내대학서 '열공'

고졸 채용 '쓰는 일꾼'서
'키우는 인재'로 달라져
하나고·외고 출신도 지원
당찬 고졸들 '新주경야독'

“언제부터인지 팔도의 소녀들이 고향에서 가져온 잔디를 심기 시작했습니다. 한 뼘씩의 잔디가 모여 팔도잔디. 작은 뜻이 모여 큰 일을 이룬다는 것, 우리의 믿음입니다.”

한일여자실업고등학교(현 한일전산여자고등학교) 졸업생 김옥란 씨가 아이 손을 잡고 나온 1980년대 한일합섬 광고 문구다. “엄마 잔디는 어딨지”라는 아이의 질문에 교복을 입은 단발머리 여학생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잔디를 심는 흑백 회상 장면이 이어진다.

팔도잔디는 1974년 개교한 한일여실고의 운동장 잔디밭이다. 집안 형편 때문에 학업을 포기하고 남동생이나 오빠 학비를 대기 위해 돈을 벌어야 했던 소녀들은 고향에서 가져온 한줌의 잔디를 눈물로 심었다. 한일합섬이 세운 부설학교는 배움의 기회였다. 낮엔 일하고 밤엔 공부하는 고된 삶의 상징이기도 했다.

그로부터 40년 가까이 흐른 세월은 일과 병행하는 공부의 수준과 여건을 한층 높여 놓았다. 박근혜 정부는 창조경제를 이루기 위해 ‘열린 채용’을 앞세운다. 기업들은 ‘일꾼’으로 ‘쓰려는’ 게 아니라 ‘인재’로 ‘키우기’ 위해 사내에 대학을 만들고 있다. ‘팔도잔디’의 진화다.

한일여실고 학생들은 1970, 1980년대 산업화의 주역이었고, 2013년 ‘당찬’ 고졸 인재들은 남과 다른 큰 꿈에 도전장을 던진다.

지난해 28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한화건설 고졸공채에 합격한 정우영 씨(19)는 한화기업대학 건축학과에 입학했다. 그는 “대졸 출신 사원들을 보면서 공부에 대한 아쉬움이 컸다”며 “앞으로 전공뿐 아니라 영어도 익혀 사우디아라비아나 요르단에서도 일하고 싶다”고 했다. 그의 목표는 한화건설 사장이다.

한화뿐 아니라 LG전자, 현대백화점이 기업대학을 운영하고 있다. 올해 롯데백화점과 인천지역 중견기업인 우진프라임도 기업대학을 연다. CJ푸드빌, SK텔레콤은 고용노동부에 기업대학 설립을 신청해 심의 절차가 진행 중이다. 사내대학은 삼성전자 삼성중공업 SPC 등 3곳에서 올해 대우조선해양, 현대중공업, 산업은행, LH까지 4곳 더 늘었다. 포스코 GS칼텍스 아모레퍼시픽 신세계 기업은행 등 12개 기업이 추가 설립을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 지원과 기업의 관심이 커지면서 인재도 몰린다. 지난해 대우조선해양에 입사해 이달 중공업사관학교에 입학한 안치우 씨(19)는 절반 이상의 졸업생이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를 비롯한 명문대에 가는 하나고 출신이다. 그는 “내 꿈은 대학생이 아니라 설계 전문가가 되는 것”이라며 “솔직히 서울대에 합격했으면 고민했을지 몰라도 바로 취업해 현장에서 뛸 수 있다는 매력을 포기할 수 없었다”고 했다. 부산외국어고를 졸업한 강영재 씨(19)는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대학 진학 얘기만 들어 꿈이란 걸 잃어버린 느낌이었다”며 “점수에 맞춰 대학에 진학한 친구들은 벌써 불만을 나타내고 있지만 나는 돈을 벌면서 공부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하영 한화기업대학 학장은 “연간 한 명당 500만원 정도의 학비가 드는데 80%가량을 정부에서 지원받고 나머지는 회사가 부담한다”며 “고졸사원을 늘리고 이들의 잠재력을 키워갈 수 있는 시스템으로, 기업 입장에서는 사람에 대한 투자인 셈”이라고 말했다.

윤정현/정태웅/양병훈/김대훈 기자 hit@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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