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택시 타세요. 안 갑니다.” “빈 차인데 왜 안 가요. 승차거부하시는 거예요.”

지난 8일 밤 12시35분, 서울 서교동 홍대 앞 KT&G 상상마당 인근 노상. 클럽과 술집 등이 밀집한 이곳에 택시 여러 대가 도로 갓길에 늘어서 있었다. 대부분 택시 앞 유리창에는 승객을 태우겠다는 표시등인 ‘빈차’ 등이 꺼져 있었다. 한두 대는 ‘예약’ 표시등을 켜놓고 있었다. 한국경제신문 취재팀이 이날 밤 12시부터 다음날 새벽 2시까지 지켜본 결과 수십명의 승객이 택시를 타기 위해 문을 열었지만, 차 밖에서 서성이던 택시기사들은 번번이 승차를 거부했다. 다른 택시들이 이들 사이에 차를 대기라도 하면 “먼저 대고 있으니 다른 곳으로 가라”고 강짜를 부렸다. 택시 기사들은 주변에 삼삼오오 모여 초조한 듯 담배를 피우고 두리번거리며 누군가를 찾는 듯했다. 두 시간 정도를 승차 거부하며 버티던 S운수의 30대 중반 택시기사는 비틀거리는 취객이 다가오자 반기듯 부축해 태운 뒤 그제야 빈차 표시등을 켜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7년 동안 홍대 인근을 중심으로 택시 영업을 해온 구자근 기사(66)는 “‘서울’ 번호판을 단 이들이 가장 승객이 많은 12시 전후에도 손님을 태우지 않고 서 있는 건 취객을 골라 태우기 위해서라고 볼 수밖에 없다”며 “이곳 외에도 지하철 2호선 홍대입구역과 홍익대 정문 앞 등지에서 불을 꺼놓은 채 취객만 태우는 20~40대 택시기사들이 요즘 많아졌다”고 귀띔했다.

1시간반쯤 지난 9일 오전 2시께 지하철 2호선 합정역 앞. 30대 초반의 남자가 택시를 향해 스마트폰을 흔들고 있었다. 인근에서 손님을 기다리던 택시기사 오모씨(56)는 “분실 스마트폰을 사기 위해 오후 9시부터 오전 2시까지 대기하는 장물업자”라고 말했다. 기자가 택시를 탄 채 스마트폰을 팔 것처럼 접근해 달라고 부탁했다.

오씨가 장물업자에게 다가가 “‘갤럭시S 3’를 갖고 있는데 얼마에 살 것인가”라고 묻자 “상태만 좋으면 40(만원)까지도 주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택시 기사들에 따르면 “홍대 입구에는 승차거부 택시 단속을 위한 단속반도 오지 않아 취객을 상대로 한 스마트폰 절도 위장 택시기사들이 활개를 치고 있다”고 말했다.

○유흥가 맴도는 불꺼진 택시 주의보

서울 강남역, 홍대역, 북창동 등 유흥가 밀집지역에서 자정을 넘겨 귀가하는 취객을 노린 전문 스마트폰 털이범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이들은 주로 취객에게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택시기사로 ‘위장’한다. 경기불황으로 사납금 채우기도 빠듯해지면서 쉽게 돈을 벌 수 있다는 유혹에 빠진 일부 택시기사들이 본업(택시영업)은 뒷전인 채 취객의 휴대폰을 노리고 동호회까지 조직하는 실정이다.

한국정보통신진흥협회의 자료에 따르면 분실 휴대전화가 주인에게 돌아오는 경우는 2010년 4.8%, 2011년 4.5%, 올해 7월까지는 3.5%로 줄었다. 해마다 90만개 이상의 휴대폰이 ‘지하 시장’에서 거래된다. 전병헌 민주통합당 의원이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휴대폰 순분실건수(총 분실신고건수에서 분실해제건수를 뺀 수치)’가 지난해 100만건이 넘었다. 경찰 관계자는 “고가 스마트폰 밀수출 시장은 연 수천억원 규모로 형성돼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취객 태워 히터 틀고 잠들면 ‘몸 수색’

이들의 훔치기 기술도 ‘습득’에서 ‘절도’로 대담해지고 있다. 정상영업을 하는 과정에서 취객들이 흘린 스마트폰을 주워 파는 ‘부업’ 수준을 벗어난 것.

서울 광진경찰서가 최근 만취한 승객을 골라 태운 뒤 스마트폰을 훔쳐 팔아온 택시기사들을 무더기로 검거하면서 전문털이범들의 치밀한 절도기술이 드러났다. 유흥가 앞에서 술 취한 승객이 타면 우선 히터를 30도 가까이 강하게 가동한다. 취객이 쉽게 잠들게 해 스마트폰을 훔치기 위해서다. 훔친 스마트폰을 안전하게 보관할 비밀장소도 사전에 만들었다. 바지 속에 무릎보호대를 차고 그 안에 훔친 휴대폰을 숨기는 치밀함도 보였다. 이들은 아예 본업을 내팽개친 채 동호회 모임을 만들어 서울과 수도권 유흥가에서 주로 새벽시간대 취객을 털어온 걸로 드러났다.

보다 교묘한 수법도 등장했다. 박모씨(45)는 최근 서울 북창동의 술집에서 회식을 마치고 새벽 2시가 조금 넘어 택시를 탔다. 일산신도시 집까지 가는 도중 택시기사가 수차례 “전화가 왔다”며 깨우는 통에 안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확인하다 휴대폰을 결국 차 안에 떨어뜨렸다. 집에 다 왔다는 기사의 재촉에 그는 잠에서 깼고, 요금을 내려 하자 “이미 냈으니 빨리 내리라”며 택시기사가 재촉했다. 박씨는 “다음날에야 택시 안에서 걸려온 전화를 확인하라고 깨운 것도, 택시비를 냈으니 급히 내리라고 한 것도, 모두 스마트폰을 노린 기사의 각본이었다는 걸 알아챘다”고 허탈해 했다.

○배터리 분리…신호 30초 뒤 끊기면 분실신고

취객에게서 휴대폰을 훔친 뒤 털이범들이 가장 먼저 하는 건 배터리 분리다. 완전범죄를 위해서다. 단순히 휴대폰의 전원을 끄는 것과 배터리 분리는 큰 차이가 난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배터리를 분리하면 위치추적이 불가능하다. 분실자가 위치추적을 하더라도 배터리를 분리한 장소 반경 300m 내에 분실 휴대폰이 있는 걸로 나타난다. 전원을 꺼두면 전원이 꺼졌다는 안내가 바로 나가지만 켜진 전화의 배터리를 분리하면 신호음이 계속 나간다.

SK텔레콤 직영대리점 한 직원은 “휴대폰을 잃어버린 걸 알고 위치추적해 보면 집 근처에 있는 걸로 나오고 신호도 정상적으로 이어져 분실자들은 길가에 떨어뜨렸고 누군가 보관하고 있어 찾을 수 있다는 희망으로 분실신고를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이어 “배터리가 분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전화를 걸면 상대방이 받지 않을 경우 1분 정도 신호가 간 뒤 끊긴다”며 “하지만 배터리를 분리해놓은 상태에선 30초 정도 신호가 가다 중단된다”고 덧붙였다.

택시영업 경력 10년차인 김모씨는 “돌려줄 마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남의 휴대폰 배터리를 분리하는 번거로운 일을 할 이유가 없다”며 “결국 택시에서 휴대폰을 분실했을 경우 통화음이 가는 시간을 체크한 뒤 30초 만에 꺼지면 못 찾는다고 보고 분실신고해야 한다”고 말했다.

○분실폰 10개 도장 찍으면 20만원 추가 지급

분실 휴대폰을 사려는 장물업자들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지하 거래시장에서 스탬프 도장를 찍어주는 것과 비슷한 ‘쿠폰제’도 등장했다. 분실 휴대폰 밀수출이 남는 장사이다 보니 밀수출조직이 많아지면서 생긴 현상이다. 이들은 휴대폰 10개를 가져오면 10만원을 추가로 지급한다. 암거래가격이 40만원대인 갤럭시S3 등 최첨단 스마트폰을 10개 가져오면 별도로 20만원 이상을 줘 우대한다. ‘단골 고객’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광진경찰서에 최근 검거된 윤씨 등 택시기사들의 휴대폰 속에서 발견된 ‘단가표’를 보면 갤럭시탭은 11만5000원, 갤럭시S3는 40만원, 프라다폰은 11만5000원, 옵티머스2는 22만원 등에 거래됐다. 경찰은 “아이폰4의 경우 30만원, 아이폰4S는 40만원 선에서 거래된다”고 설명했다.

광진경찰서 담당형사는 “전문적으로 스마트폰을 노리는 택시기사가 서울에만 500여명에 이른다는 진술을 확보했다”며 “분실된 휴대폰의 90% 이상은 중국 등 외국으로 팔려나간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김우섭/하헌형/이지훈 기자 dut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