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펌의 진화 "법을 바꿔드립니다"
전국 지방자치단체는 2007년을 전후해 전봇대 지중화(地中化) 사업을 실시했다. 전봇대에 설치된 초고속 인터넷망이나 유선방송망을 땅속에 묻는 작업이었다. 이를 위해선 줄잡아 전국적으로 60조원가량이 필요했다. 재원이 마땅치 않은 지자체는 관련 비용을 통신사 및 유선방송 사업자에게 떠넘겼다.

관련 사업자들은 다급해졌다. 부당하다고 정부에 탄원도 해보고 소송도 내봤다. 결과는 아니었다. 이들이 막판에 찾은 곳은 로펌(법무법인) 입법컨설팅팀이었다. 담당 변호사들은 외국의 사례 등을 분석한 자료를 토대로 “지자체가 추진하는 사업의 비용을 민간기업에 떠넘기는 것은 부당하다”고 국회의원들을 설득했다. 국회는 지난해 전기사업법을 개정해 원칙적으로 지중화를 추진하는 지자체가 비용을 부담하는 조항을 신설했다.

로펌이 사법 분야에서 행정과 입법 분야로 활동 영역을 넓히고 있다. 단순히 소송이나 법률자문만 해주는 게 아니다. 부당하다고 판단될 경우 아예 관련 규정이나 법을 바꾸도록 국회와 정부를 설득하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일부에서는 이를 법적 근거가 없는 ‘로비’라고 지적한다. 하지만 뇌물이나 알선수재 등을 통한 불법로비는 물론 법률 외적인 문제를 많이 다루는 외국의 로비와도 다르다는 게 로펌들의 주장이다.

3일 법조계에 따르면 국내 대형 로펌인 태평양과 광장 율촌 세종 등은 입법컨설팅 업무를 맡은 조직을 ‘법제 컨설팅팀’ ‘법령 지원팀’ 등의 이름으로 잇따라 신설했다. 김앤장도 최근 관련 팀을 만든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의 주된 업무는 고객사에 불리한 법적 조항과 불합리한 규제를 유리하게 수정하는 일이다. 그러자면 법률지식과 전문적인 업무지식은 물론 탄탄한 인적 네트워크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이들 팀에 청와대와 국무총리실 법제처 국회사무처 기획재정부 등 정부 부처에서 일했던 변호사와 전직 공무원들이 대거 포진해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들의 업무는 크게 세 가지다. 애매한 규정에 대해 분명한 유권해석을 받는 것이 첫 번째다. 부당한 규제를 없애도록 법을 제정하거나 개정토록 설득하는 게 두 번째고, 부당한 법률이 만들어지지 못하도록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세 번째다.

법무법인 광장은 지난달 놀이공원에서 사용할 수륙양용 관람차가 선박법에 의해 규제받을 필요가 없다는 유권해석을 법제처에서 받아냈다. 이 관람차는 수면 바닥에서 불과 수십㎝ 위를 떠서 200m 정도를 이동할 예정이었다. 이 관람차를 선박으로 볼 경우 선박법령에 따라 선장과 해기사(海技士)를 두고 정기적으로 항구로 이동해 안전검사까지 받아야 할 판이었다. 광장 변호사들은 해외사례 등을 통해 관광진흥법상 놀이기구로서의 안전성을 확보하면 선박으로 규제받을 필요가 없다는 논리를 제시, 선박이 아니라는 유권해석을 받는데 성공했다.

물론 모든 입법컨설팅이 성공하는 건 아니다. 한 대형 로펌은 지난해 말 대형마트의 의뢰를 받았다. 대형마트의 영업시간을 제한하는 유통산업발전법 개정안을 막아달라는 요구였다. 변호사들은 국회 지식경제위원회 의원들을 대상으로 “영업시간 제한이 대형마트의 영업자유와 소비자들의 행복추구권을 침해할 뿐만 아니라 마트에 입점해 있는 영세 업체들에까지 피해를 준다”고 설득했다. 비록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지만 이후 대형마트에 대한 규제 일변도의 기류는 다소 수그러들었다.

임도원 기자 van7691@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