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생각, 생각, 생각 ~ 건축학도의 '카피학 개론'

#마음을 움직이는 광고카피(copy)

대학 시절 같은 과에 아주 친한 선배(나이로 따지면 오빠)가 있었다. 건축학과(고려대) 학생들은 건축공모전을 앞두고 작업실에서 밤하늘의 별빛을 보며 꿈을 키웠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다. 대학 5학년(건축학과는 5년제). 극심한 취업난에 선배의 고민과 좌절도 늘어갔다. 수북했던 머리는 어느새 몰라보게 숱이 줄었다. 같은 과 후배는 옆에서 지켜보며 도와줄 수 없기에 마음이 아팠다. 탈모로 고생하는 그 선배를 생각하며 카피를 써 내려갔다. 지난해 제32회 제일기획 광고대상 작품부문 대상 수상작 ‘하이모’는 이렇게 탄생했다.

이번주 JOB 인터뷰 대상이 카피라이터라는 사실에 설레었다. 질문을 준비하는 과정도 자유로웠다. 카피는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사람이 하는 작업이 아닐까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막연히 뭘 질문해도 막힘 없는 대답을 들을 것 같았다. 참신한 그 무언가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밑도 끝도 없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서울 이태원의 제일기획으로 향했다.

#사람을 위한 쉼터 ‘제일기획 로비(lobby)’

보통 빌딩 1층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상업성의 카페는 없었다. 대신 로비 중앙엔 누구나 앉아서 책을 보며 기다릴 수 있도록 의자가 예쁘게 디자인돼 있었다. 또 로비 벽면을 가득 채운 힘 있는 조형물은 마치 미술관에 들어온 느낌을 주었다. 쉼과 힘의 여유로운 공간이었다. 방문자 확인 후 2층 휴게실 ‘i-SPA(아이디어 공간)’로 올라갔다. 2층 공간을 다 털어서 만든 휴게실엔 몸의 이완을 위한 안마기, 잠시 눈을 붙일 수 있게 디자인된 동글이 의자, 어릴적 추억을 자극하는 커다란 오락기 그리고 벽면엔 만화책과 잡지책이 즐비했다. 휴게실 한쪽 카운슬링 룸에선 누군가 상담을 하는 목소리도 들렸다. 휴게실 중앙엔 ‘Passion for Ideas’란 문구가 있었다.

이곳에서 인터뷰 주인공인 제일기획 신유희 카피라이터(26)가 취재진을 맞았다. “아이디어가 막히면 이곳에 내려와 만화책을 보면서 빈둥빈둥거려요.” 올 1월 입사한 신씨는 현재 기획, 카피, 아트디렉터 동기들과 팀을 이뤄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인터뷰는 휴게실 중앙의 푹신한 의자에 앉아 광고인을 꿈꾸는 대학생 4명과 함께 진행했다.

생각, 생각, 생각, 생각 ~ 건축학도의 '카피학 개론'

▷여기 오면 없던 아이디어가 막 나오나요.

“그렇지는 않고… 복잡해진 머리를 식히러 와요. 저는 과제가 주어지면 그때부터 생각을 시작해요. 작은 생각에 조금씩 살을 덧붙이는 스타일이죠. 순간 ‘번쩍!’ 하는 아이디어를 내는 스타일은 아닌 것 같아요.”

▷정신적 압박도 심할 것 같은데.

“아이디어는 정답이 없잖아요. 퇴근해서도 계속 생각을 이어갑니다. 5개월밖에 안됐지만 벌써 익숙해졌어요. 정말 아이디어가 안 떠오르면 그땐 ‘포기’합니다. 그럼 다른 선배들이 더 좋은 아이디어를 ‘까’주셔요.”(‘아이디어를 깐다’는 광고인들의 은어. 아이디어 회의 때 열띤 토론을 표현하는 말이다.)

▷프로젝트가 주어지면 야근도 많죠.

“건축학과 출신이라 대학시절부터 1주일에 사나흘씩 밤새우는 것은 단련됐어요. 좋아하지 않으면서 편하게 사는 것보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다소 힘들게 사는 것이 훨씬 나아요.”

▷스트레스는 어떻게 푸나요.

“혼자 음악 들으면서 산책을 자주 해요. 또 일부러 몇 정거장 앞서 내려 걸으면서 생각을 정리하는 편이에요. 극도의 스트레스 땐 역시 친구들과 폭풍수다가 최고죠.”

올 2월 고려대 건축학과를 졸업한 신유희 프로.(제일기획에선 김낙회 사장부터 신입사원까지 모두에게 이름 뒤에 ‘프로’라고 붙인다.) 지난해 봄. 한 학기를 남기고 휴학 중 작품 ‘하이모’로 대상을 받았다. 그것도 팀이 아닌 혼자서. 연이어 제일기획 8주 인턴십과 칸 국제광고제 기간에 열리는 ‘로저 해추얼 아카데미’에 참가, 전 세계에서 온 예비 광고인들과 함께 교육을 받는 기회도 얻었다.(제일기획은 광고대상 수상자 중 일부를 해마다 참가시키고 있다.)

▷건축학도인데 어떻게 광고인이 되었죠.

“건축은 크게 두 과정이에요. 하나는 건물을 짓기 전 컨셉트와 아이디어를 구상하는 것과 설계도와 실제공간을 디자인하는 과정으로 나뉘죠. 제 스타일엔 첫 번째 과정이 맞아서 도전했죠.”

▷제일기획 광고대상 준비과정의 노하우가 있다면.

생각, 생각, 생각, 생각 ~ 건축학도의 '카피학 개론'
“우선 과거 수상작(인쇄부문은 위트 있는 그래픽 작품이 다수)을 분석했어요. 그리고 세계 유명광고제 작품을 보면서 트렌드와 창의적 발상법을 연구했죠. 그리고 나의 주제 ‘하이모’ 주타깃 고객인 중년 남성의 마음을 어떻게 움직일까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어요. 시각적인 자극보다 공감할 수 있는 스토리를 담으려고 노력했죠. 이것이 심사위원의 마음도 움직였지 않았나 싶어요.”

▷8주간의 인턴생활이 궁금해요.

“첫날부터 현업에 투입, 회의실·촬영장·편집실을 오가며 광고의 A부터 Z까지 몸으로 배웠어요. 10년차 이상의 프로와 인턴들의 수평적 아이디어 회의는 제겐 너무 신선했어요. 실제로 인턴이 낸 아이디어가 TV에 방송되기도 했지요.”(광고대상을 받으면 제일기획 인턴십 기회가 주어진다.)

▷‘로저 해추얼 아카데미’ 추억은 평생 못잊을 것 같은데.

“전 행운아예요. 전 세계 광고인이 1주일 동안 ‘creativity(창의성)’를 주제로 이야기하고 듣는 가운데 자극을 많이 받아요. 그들 중엔 실제 광고계의 큰 인물에게 스카우트된 사람도 있었지요. 낮엔 광고를 배우고 밤엔 파티에 초청받아 광고계 거물과 인사를 나눴던 황홀한 시간이었어요.”

▷광고대상을 받으면 바로 입사할 수 있나요.

“아니요. 저도 광고직 직무적성검사-면접-신체검사를 거쳤어요.”

▷막상 입사하니 어때요.

“제가 꿈꾼 것 그 이상이에요. 일을 한다기보다 배우면서 공부하는 느낌? 들어와보니 다양한 분야가 있었어요. 옛날엔 광고회사라면 TV CF만 생각했는데, 요즘엔 온라인 캠페인, 이벤트·전시·스폰서십을 다루는 BTL(below the line), 스포츠 마케팅 등 다양한 분야가 있더라고요.”

▷후배들에게 해줄 말이 많을 것 같은데.

“대학 때 너무 광고에만 집중하기보다 다양한 경험이 더 도움 될 것 같아요. 독특한 아이디어를 내야 하는 회사인 만큼 다양한 사람을 원하니까요.”

가슴속에 새겨놓은 명카피가 있느냐고 물었다. 지난해 칸광고제에서 본 나이키 광고 ‘Write the future’란 카피에 가슴이 뛰었단다. 가까운 미래 나이키와 한번 같이 일해 보고 싶은 욕심도 생겼단다. 이어서 “누군가 제 광고를 보고 생각을 바꾸게 됐다는 말을 들으면 행복할 것 같아요. 정말 어떤 이의 평생 가슴에 남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그런 카피를 쓰고 싶어요.” 이제 입사 6개월밖에 안됐지만 신유희 씨는 ‘사람을 사랑하는 카피라이터’였다.

공태윤 기자 true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