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과장 & 李대리] 출근 첫날부터 '판촉' 닦달…짜증 폭발…"혹시 취업 사기?"
유학파 MBA로 이동통신업체 A사에 들어온 김 과장. 그는 출근 첫날 아침부터 휴대폰 통신사를 A사로 바꾸라는 얘기를 듣고는 다소 언짢았다. “자기 회사 서비스를 이용해야 한다는 원칙은 이해하지만, 첫 출근날부터 그 얘기라니….” 김 과장의 짜증은 그날 오후 극에 이르렀다. 입사 기념으로 신규 가입자 10명을 확보하라는 지시가 떨어진 것. 며칠을 고민하던 그는 자기 명의로 10개의 번호를 신규 개통한 뒤 핸드폰 10대를 책상 앞에 진열해 뒀다. 이를 본 임원들은 그에게 다시는 판촉 캠페인을 시키지 않았다. 입사 초기부터 무언의 항명을 한 김 과장은 결국 B전자로 옮겼다.

김 과장, 이 대리들은 자사 제품 판촉 시즌 때마다 골머리를 앓는다. 자사 제품의 판매를 돕는 것은 직장인으로서 당연한 도리이겠지만, 현실이 그리 녹록지만은 않다. 1년에 한두 차례씩 자사 제품 판촉 캠페인에 참여하다 과장급쯤 되면 ‘사돈의 팔촌’까지 동원 안 된 사람을 찾기 힘들다. 김 과장, 이 대리들이 겪는 ‘판촉 캠페인’ 에피소드를 모아본다.

◆“으휴~ 결국 내 돈으로 때운다”

은행 직원 박 대리는 최근 출시된 신상품 판촉 때문에 머리가 아프다. 판촉 대상은 이 은행의 계열 카드사에서 출시한 모바일 카드로, 상품의 특성상 특정 통신사와 특정 스마트폰을 쓰고 있는 고객을 찾아내는 것이 관건이다. 하지만 통신사는 KT이면서 스마트폰은 아이폰이 아닌 제품의 조합이다보니, 주변 지인들에게서는 해당 조건을 갖춘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박 대리는 결국 정보통신(IT) 기기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인터넷 카페에 글을 올렸다. “모바일 카드에 관심 있는 분을 찾습니다. 제게 연락주신 뒤 카드 신청서를 작성해 사진을 찍어 보내주시면 현금 5만원을 입금해 드리겠습니다.”

삼성전자 사원 최모씨는 신입사원 연수 기간 중 회사 제품을 판매하게 했던 프로그램을 생각하면 지금도 화가 난다. 품목은 카메라와 MP3플레이어, 지역은 단 한 번도 가본 적이 없고, 아는 사람 역시 하나 없는 청주였다. 물건을 팔기 위해 들어간 가게마다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 최씨는 결국 본인이 두 가지 모두를 하나씩 구입했다. “팀별로 점수를 내기 때문에 못 판 사람은 눈치가 보이는 상황이어서 어쩔 수 없었죠. 연수 중이라 월급도 적은데 카메라 값까지 내고 나니 그 달은 완전 빈손이더군요.”

대형마트 식품담당인 정 대리는 아침마다 두유 몇 팩씩을 ‘원샷’한다. 두유 포장에 작은 흠집이라도 있으면 고객들이 찝찝한 마음에 제품을 사가지 않는 탓에 모두 폐기물로 분류된다. 폐기물로 처리되면 점포 이익률이 떨어지기 때문에, 포장에 흠집 있는 두유는 결국 담당자가 사게 된다. 그래서 정 대리는 아침마다 ‘웰빙 정신’으로 두유를 원샷한다. “집에서 와이프는 건강에 좋은 것 아니냐며 좋아하지만, 전 이제 두유만 보면 신물이 올라와요. 원치 않는데 돈 쓰는 것도 아깝고….”

◆“구두만 보면 찢어버리고 싶어요”

백화점 매장에서 모 구두 브랜드의 판매일을 했던 방모씨. 매년 설과 추석, 두 차례씩 악몽 같이 돌아오는 상품권 판촉 시즌을 못 견디고 올초 퇴사했다. 여직원들은 보통 10만원짜리 상품권 50~100장씩, 남직원에게는 기본 400장에다 경력에 따라 추가로 할당됐다. 그나마 상품권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도매 업체에 할당 물량의 상당 부분을 5~10%가량 싸게 넘기는 식으로 영업을 해왔지만 올해는 회사에서 이마저도 금지하면서 영업이 어려워졌다.

결국 할당을 채우지 못해 지점장에게 인격 모독까지 당한 그는 결국 직장을 그만뒀다. “친구들과의 술자리 도중 몰래 나와 친구들이 벗어 놓은 구두에 흠집을 내고 있는 제 자신을 보고 ‘이건 아니다’ 싶었어요.”

◆보험과 카드의 ‘앙상블’

보험사에 다니는 강 대리는 판촉 시즌이 돌아온 요즘 ‘신용카드 발급신청서’를 끼고 다닌다. 보험회사 직원이 왜 카드 신청서를 들고 다니냐고? 계열 카드사에 다니는 대학 동기 권 대리와 ‘모종의 계약’을 했기 때문이다.

입사 첫 해부터 판촉 시즌마다 보험을 팔러 다닌 강 대리는 올해도 어김없이 돌아온 캠페인 때문에 골치가 아팠다. 더이상 보험을 팔 지인이 없었기 때문이다. 카드사 권 대리도 상황은 마찬가지. 둘은 결국 서로의 상품을 바꿔 팔기로 했다. “또 보험 팔러 왔냐”는 친구에게 “이번엔 보험이 아니라 카드”라고 말하는 강 대리. 강 대리와 권 대리는 약속한 대로 상대방을 위해 20건씩 계약을 성사시킨 후 계약서를 바꾸기 위해 이달 말 다시 만나기로 했다. “올해는 이렇게 넘어 가지만, 내년에는 또 어떤 꼼수를 부려야 할지….”

◆“애사심도 생겨요”

외국계 증권사를 다니던 박 부장은 최근 한 대형 정수기 업체의 전략 담당 임원으로 스카우트됐다. 이직 후 그가 고참 임원에게서 들은 첫 지시는 ‘정수기 10대를 팔아오라’는 것이었다. 사장의 특명에 따라 신입 직원들의 첫 미션은 정수기 10대 판매였다. 여기에는 임원도 예외는 아니었다. 증권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그였지만, 로마에 온 이상 로마의 법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아는 지인들을 총동원해 정수기 10대를 다 팔았다. “정수기를 팔려고 회사를 옮겼느냐는 비아냥은 참기 힘들었지만 솔직히 성공하고나니 자부심도 듭니다.”

지난해 출판사에 입사한 신 사원은 첫 몇 달간 자신이 ‘취업사기’를 당한 건 아닐까 하는 고민에 빠졌다. 사무직으로 들어왔건만 ‘입사하면 전집 판매 10건은 기본’이란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입사 동기 중 하나는 “요즘 같은 IT시대에 누가 전집을 사느냐. 규모가 작은 출판사도 아닌데, 최근 언론에서 보도한 취업사기의 냄새가 난다”는 말을 남기고 바로 퇴사했다. 그런 동기를 보며 갈등하는 그에게 한 선배가 말했다.

“너 진짜 좋은 물건이 있으면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랑 나누고 싶지 않니? 판매 강요라고 생각하지 말고 회사가 만든 물건에 대한 자신감 차원이라고 생각을 바꿔봐.” 신 사원은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지인들에게 자연스럽게 얘기를 꺼내며 지금까지 5부를 판매했다. “아직 10건은 못 채웠지만 사내에서 어떤 불이익도 받은 게 없어요. 전집 판매는 애사심을 키우는 수단인 것 같고, 실제 그런 효과도 있다고 봅니다.”

김일규/윤정현/강영연/정소람 기자 black0419@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