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책 종이로 수표 위조…장당 최고 300만원에 거래
# 지난 11일 오후 2시30분, 서울 오장동 중부시장에서 과일가게를 하는 노모씨(54)는 한 노인에게 대추 1㎏을 팔고 10만원짜리 수표를 받은 뒤 거스름돈을 건넸다. 문득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노씨는 곧바로 근처 은행에 수표를 들고 가 감식을 의뢰했다. 위조수표였다. 그 길로 위조수표 사용자를 찾아나선 노씨는 같은 시장 내 멸치가게에서 물건 값으로 위조수표를 내밀고 있는 ‘현장’을 잡았다. 노씨는 다급하게 112에 신고, 범인을 잡을 수 있었다. 경찰 조사결과 범인은 컬러복사기를 이용해 5만원권 지폐 150장과 10만원권 수표 30장을 복사한 위조범이었다.

#지난해 2월24일, S은행 이대역지점에 액면가 20억원짜리 수표가 들어왔다. 창구 직원은 수표를 감별기에 넣어 가짜인지, 진짜인지를 확인했다. 이상이 없었다. 수표 번호와 액수, 발행 날짜에도 문제가 없었다. 진짜라고 생각한 직원은 손님이 지정한 계좌 20곳으로 1억원씩 나눠서 입금했다. 다음날 은행이 발칵 뒤집혔다. 진짜 수표를 가지고 있던 고객 이모씨가 나타난 것이다.

화들짝 놀란 은행 측이 다시 정밀하게 확인해보니 이미 지급된 문제의 수표는 정교하게 위조된 가짜였다. 범인들은 은행 수표감별기가 수표용지에 위조 방지장치가 제대로 있는지만 확인한다는 허점을 노렸다. 진품 수표를 발급받아 액면가와 일련번호를 바꿔도 수표감별기가 액수를 구분하지 못한 채 진품 수표로 판명하는 것을 미리 알고 범행을 꾸몄던 것. 경찰은 2개월 만인 지난해 4월 위조수표범 일당을 검거했다.

명절을 앞두고 재래시장이나 상가 등에 위조된 수표가 거래되는 사례가 늘고 있어 경찰에 비상이 걸렸다. 수법도 갈수록 정교해지고 있다. 노씨의 사례처럼 컬러복사기를 이용한 조잡한 위폐 제조범은 생활고에 시달리는 생활형 범죄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지능범들은 위폐감별기의 구조적인 허점을 파고들어 은행에서조차 식별하지 못할 정도로 정교하게 위조수표를 만드는 바람에 경찰과 전문 위폐감식사들이 골머리를 앓고 있다.

○성경책, 사전(辭典) 용지로 위조

최근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가 한국에서 대표적인 수표위조범 2명 가운데 임모씨를 검거하면서 정교한 위조수표 제조의 은밀한 세계가 드러났다.

서울청 광역수사대 관계자는 “수표위조를 담당했던 임모씨는 한국 위조화폐범의 양대 계파 중 하나를 만든 장본인”이라며 “독학으로 익힌 위조술이 너무나 정교해 다른 판매책들도 모두 임씨의 위조수표나 화폐를 구해다 팔려고 했다”고 설명했다.

이들은 실제 수표번호가 찍힌 유가증권을 만들어 조직적으로 불법 판매했다. 이들이 유통 가능한 수표번호를 입수할 수 있는 건 ‘당좌수표 할인업체’와 연결돼 있기 때문. 당좌수표 할인업체가 ‘당좌수표 할인을 받아준다’는 광고를 일간 신문에 실어 고객들로부터 진본 당좌수표와 사업자등록증을 확보, 유통 가능한 수표번호가 찍힌 유가증권을 만들어내는 수법이다.

이들은 단순히 컬러복사기를 사용하지 않는다. 성경책이나 사전(辭典)에 사용되는 얇은 용지 두 장에 각각 수표의 앞뒤 면을 복사한 뒤, 코팅기를 이용해 압축시키는 정교한 방법을 쓴다. 수표의 은화(무궁화 문양)까지 정교하게 위조하면 위폐감식기조차 식별해내기 어렵다.

○위조수표 한 장 최고 300만원에 거래

위폐조직범들은 대부분 위조책, 판매책, 배달책 등 점조직으로 나뉜다. 위조책이 액면가, 날짜 칸은 비어 있는 은행 발행 당좌수표·가계수표·약속어음 등을 만들어 총판에 장당 10만~15만원에 판다. 총판은 판매책이 요구하는 금액을 수표나 어음에 적어 사업자등록증과 함께 세트로 30만~50만원에 팔아넘긴다. 판매책은 일간지에 ‘위조수표 광고’를 실어 원하는 액면가에 따라 장당 50만~300만원에 되파는 식이다.

서울청 광역수사대 관계자는 “신문광고에 ‘진성(眞性) 어음’이라며 광고하는 사람들은 십중팔구 위조수표 판매자들”이라며 “부도날 일이 없는 대기업 어음은 실제로 할인해주기도 하지만 위조수표 취급이 주된 업무”라고 설명했다.

위폐범과 이를 유통시키는 이들은 점조직으로 움직이고 대포폰을 사용, 수사망에도 쉽게 걸려들지 않는다. 지난해 6월 위조수표 1만여장을 위조·판매한 일당을 잡아들인 서울청 광역수사대 관계자는 “위조책과 판매책 등은 서로 ‘강 부장’ ‘이 사장’하며 이름도 감추는데다, 수표를 전달하는 퀵서비스원도 그들에게 웃돈을 받고 7년이 넘게 같이 일한 사이라 수사단계마다 추적경로가 끊겨 검거하는 데 애를 먹었다”고 말했다.

경찰과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한은 화폐취급 과정에서 발견되거나 금융회사와 일반 시민들이 한은에 신고한 위조지폐는 총 1만7장으로 전년 대비 709장(7.6%) 증가했다. 1만원권 위조지폐가 전년 대비 43.2% 증가, 가장 큰 폭으로 늘어났다.

○‘30억원 위조수표’ 사건 후 고액사기 원천봉쇄

이렇듯 ‘속이려는’ 위조지폐범들의 범행 수법이 지능화되면서 은행 등 금융회사의 위폐감식반도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힘쓰고 있다. 지난해 2월 30억원 위조수표를 현금으로 바꿔간 사건이 일어난 뒤 일반 자기앞수표 위·변조 방지장치를 전격보강한 것이 대표적 사례다. 은행에서 위조수표 감별을 할 때 수표 종이의 질과 수표 뒷면의 위조방지 형광물질만을 인식한다는 허점을 이용한 위조범들은 110만원짜리 실제수표 2장의 액면가를 칼로 긁어 10억원과 20억원으로 고치고, 10억원과 20억원짜리 진본수표의 사본에서 일련번호를 따와 110만원짜리 수표에 덮어씌워 위조수표 감식기에도 걸리지 않았다.

‘30억원 위조수표’ 사건이 외부에 알려지자 한국조폐공사는 일반 자기앞수표의 위·변조 방지 장치들을 크게 보완했다. 먼저 수표번호 부분의 용지는 특별히 얇게 제조, 날카로운 도구로 번호를 변조하면 용지가 훼손되게끔 만들었다. 자기앞 수표에 ‘1억원 이하’‘1억원 초과’ 등 금액단위를 명기해 저액권을 고액권으로 변조하지 못하도록 만들었고, ‘자기앞수표’의 문자도 보는 각도에 따라 색상이 변하도록 색변환 잉크를 사용했다.

조영희 한국조폐공사 선임연구원은 “화폐에 비해 수표의 위조방지 장치가 취약했던 것이 사실”이라며 “갈수록 지능화되는 범행을 막기 위해 위조방지 장치들의 수준도 더욱 높아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심성미 기자 smsh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