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말라야 안나푸르나에서 실종된 박영석(48) 대장은 생사의 기로가 된 마지막 순간까지도 의연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세계 3대 난벽(難壁)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안나푸르나 남벽, 거기에서도 아무도 오르지 않은 새 길을 개척하는 작업은 너무나 위험했다.

그러나 "1%의 가능성만 있어도 도전한다"는 박 대장의 신념에는 흔들림 없었다.

박영석 원정대의 일원인 이한구 대원은 3일 서울대병원에서 열린 영결식에 참석해 원정대의 마지막 모습을 전했다.

그의 눈에 마지막으로 비친 박 대장은 강기석, 신동민 대원과 함께 암벽에 매달려 걱정하지 말라고 손을 흔들고 있었다.

이 대원과 김동영 대원은 안나푸르나 남벽 출발점 근처까지 원정대와 동행했다가 계획에 따라 근처 임시텐트에 잔류했다.

힘이 센 신동민 대원이 선두에 나서고 박영석 대장이 중간을 잇고 강기석 대원이 뒤를 받치는 형태로 등반이 시작됐다.

안나푸르나는 낮에는 다소 덥고 밤에는 몹시 추운 까닭에 두 대원은 옷을 벗어 몸에 매달았고 박 대장은 아예 방한복을 입은 채 등반했다.

이 대원은 "원정대가 처음에 30m밖에 되지 않는 직벽을 오르는 데 참으로 긴 시간을 보냈다"며 험난한 환경을 설명했다.

오후 들어 날씨가 무척이나 나빠졌다.

갑자기 기상예보를 뒤집고 눈이 쏟아졌다.

안개 사이로 돌덩어리가 굉음을 내며 폭격기가 편대비행을 하듯 갑자기 떨어지기도 했다.

이 대원은 "빨리 철수하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내가 결정할 사안이 아니라 말을 하지 못했다"며 "다행히도 박 대장이 상황을 현명하고 정확하게 판단해 하산하겠다는 무전을 보내왔다"고 말했다.

그는 "안나푸르나 남벽은 무섭고 상황도 너무 안 좋았다"며 "영석이 형이 판단을 잘했기 때문에 결코 무모한 도전은 아니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그것을 마지막으로 교신이 끊겼다.

오후 6시 연락이 끊기고 나서 이한구 대원과 김동영 대원은 현지 근처를 여러 차례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애를 태웠다.

다음 날 해가 뜨자마자 출발점 근처로 올라갔으나 원정대는 눈에 보이지 않고 불러도 불러도 아무 대답이 없었다고 했다.

박영석 대장은 등반 전에 상당한 부담이 있었다고 했다.

남벽을 통해 안나푸르나를 오르더라도 길이 너무 험난해 그 길로 다시 돌아올 수 없었고 차선책인 북면(노멀루트)은 너무 오래전에 등반한 까닭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본 원정대가 북면으로 안나푸르나를 등반하다가 철수했다는 소식도 들려온 터라 대원들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이 대원은 "원정대가 돌아오지 않아서 내가 지금 울지만 현명하게 판단해서 다 내려온 다음에 당한 게 너무나도 억울하다"고 말했다.

암벽에 매달려 손을 흔들던 모습, "다들 건강하고 죽을 뻔했다"는 마지막 무전이 박 대장과 원정대가 남긴 마지막 흔적이었다.

박 대장은 원정을 떠나기 전에 캠프에서 촬영한 동영상에서 '야성을 잃어버리기 싫은 호랑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털어놓았다.

"살아 있는 것이 감사하지요.

나랑 같이 등반하다가 다른 곳으로 멀리 간 사람들도 얼마나 많은데. 그렇지만 산악인은 산으로 가야 산악인이라고 생각해요.

탐험가는 탐험을 가야 탐험가이고요.

도시에 있는 산악인은 산악인이 아니라고 봐요.

야성을 잃은 호랑이. 들판에서 뛰며 사냥을 해야 호랑이가 호랑이이지요.

나는 죽는 그날까지 탐험을 할 것입니다.

항상 감사하면서요."

원로 산악인 박훈규 씨는 "산악인들은 고산으로 떠날 때 '사고'라는 장비를 함께 배낭에 싼다"며 "이 장비를 배낭에서 꺼내지 않고 돌아온다면 그 등반은 성공한 것이 된다"고 말했다.

박 씨는 에베레스트를 등정한 최초의 한국인인 고상돈 씨와 함께 1979년 미국 알래스카 매킨리를 등정한 뒤 하산하다가 중상을 입은 채 홀로 살아남았다.

(서울연합뉴스) 장재은 기자 jangje@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