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속보]“오래된 일이라 잘 기억나지 않지만…누군가는 말해야 할 일입니다”

1997년 발생한 ‘이태원 살인사건’에 대해 묻자 김락권(54) 서울 금천경찰서 강력5팀장은 만감이 교차하는 듯 눈을 지긋이 감았다.김 팀장은 당시 용산경찰서 강력1팀 소속이었다. ‘이태원 살인사건’은 용산구 이태원동 패스트푸드점에서 대학생 조중필씨가 목과 가슴을 수차례 찔려 잔혹하게 살해된 사건이다.

11일 금천경찰서에서 김 팀장을 만났다. “초동수사가 미흡했다구요? 도대체 누가 그런 말을 퍼트린 건지 모르겠어요. 정말 열심히 수사했어요. 수사지휘선 쪽에서 어떤 지적도 나오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미군 측에서 이렇게 빨리 신병을 인도하고 협조했던 전례가 없었어요”

내내 차분하던 김 팀장은 초동수사 문제로 화제를 옮기자 분통을 터트렸다. “패터슨과 리는 경찰 조사를 받으면서도 굉장히 철이 없었어요. 반성하는 기미도 없었죠. 서로 범인이라고 지목하면서도 장난스럽게 히죽히죽 웃으면서 말했어요”

김 팀장은 2009년 개봉한 영화 ‘이태원살인사건’도 보지 않았다. “홍기선 감독이 이것저것 묻길래 여러가지 얘기를 해줬어요. 그런데 실제 사건과 다르게 각색됐더라구요. 감독 연락처도 지워버리고 영화도 보지 않았어요”

김 팀장은 용의자로 지목된 주한미군 자녀 2명 중 패터슨을 진범으로 확신했다. “패터슨의 친구가 패터슨을 범인으로 지목했어요. 피 묻은 셔츠를 소각장에서 발견했죠. 진범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런데 검찰은 부검 소견을 듣고 에드워드 리를 범인으로 지목했죠”

검찰은 “상처 중 일부가 위에서 아래 방향으로 난 것으로 미뤄 가해자의 키가 피해자보다 큰 것으로 추정된다”는 서울대 이윤성 교수의 부검소견을 참고했다. 조씨의 키는 1m76이었다. 검찰은 1m80이 훌쩍 넘는 거구인 리가 상대적으로 왜소한 패터슨보다 부검의의 소견에 더 가깝다고 판단했다.

리는 징역20년형을 선고 받은 반면 패터슨은 흉기소지 혐의만 적용 받아 기소됐다가 1998년 8월 특별사면됐다.패터슨은 1999년 잠시 출국금지가 해제된 틈을 타 미국으로 도주했다가 최근 미국에서 구속됐다. 리는 1998년 무죄 확정판결을 받고 풀려났다.

“우리가 검거하고 신병인도까지 받았는데 결국 미국으로 도망갔어요. 납득할 수 없었죠. 창피했습니다. 철두철미하게 수사해서 검찰에 넘겼는데¨그래도 유족이 ‘법정에 다시 세울 수 있다’는 한 가닥 희망을 갖게 됐으니 다행이에요. 지금까지는 절망 상태 아니었겠어요?”

김 팀장은 범죄인인도 요청에 따라 패터슨이 한국으로 송환될 가능성에는 의구심을 표했다. “영화가 개봉한 뒤 당연히 (패터슨을) 송환할 줄 알았어요. 실제 송환이 이뤄진다 해도 언제 이뤄질까요?한국인도 송환하려면 몇년 씩 걸리는 걸로 알고 있어요. BBK사건 때 김경준씨도 송환하는데 3년 걸렸어요. 제가 현직에 있는 동안 송환될 수 있을까요?”김 팀장은 ‘이태원 살인사건’ 수사관 중 현직에 있는 유일한 경찰관이다.

하헌형 기자 hh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