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먹는 그걸로 주세요. 계산? 죽기 전에 할게."

이 정도면 단골 식당이 아니라 어머니의 식탁 같다. 작곡가이자 영화음악가 · 클래식 기타리스트인 이병우 성신여대 교수(46).그가 주문한 '늘 먹는 그것'은 채소 스파게티였다. 호박과 버섯,마늘,아스파라거스 등의 채소에 신선한 토마토 소스가 버무려진 담백한 파스타다.

그런데 50가지 이상의 식사 메뉴를 갖춘 이곳 메뉴판에는 그런 게 없다. 10년 넘게 알고 지냈다는 서울 삼성동 이탈리안 레스토랑 트라토리아 모로의 김인식 셰프는 씩 웃어 보이더니 금세 김이 모락모락 나는 파스타를 뚝딱 차려냈다. 재료는 소박한 것 같은데 맛이 깊다. 기타 하나로 수만 가지 울림을 만들어내는 '이병우 음악'과 닮았다.

여섯 줄의 기타로 영화음악과 클래식 기타계를 평정한 그는 한 손으로 밥을 먹으면서도 '기타바'를 놓지 않았다. '기타바'는 통이 없는 기타로 그가 개발한 것."TV를 볼 때나 밥을 먹을 때나 이렇게 기타를 들고 놀아요. 연습할 시간이 많지 않아서요. 저는 좀 산만해서 한 번에 두 가지를 할 수 있어요. "

그는 오는 12일부터 이틀간 LG아트센터에서 '이병우의 기타콘서트'를 연다. 대중 앞에 잘 나서지 않는 그가 1년에 한 번 여는 대극장 콘서트다. 벌써 아홉 번째.올해는 그동안 잘 연주되지 않았던 음악과 영화음악을 들려줄 예정이다.

◆'기타바'숍 개관 "꿈 하나 이뤘죠"

지난 4년은 '기타바'와의 싸움이었다. 열한 살 때부터 하루도 기타를 손에서 놓은 적이 없는 그에게 언젠가부터 몸에 무리가 오기 시작했다. 어깨를 앞으로 구부리고 손목은 꺾고 목을 내밀고 하는 연주 자세가 몸에 좋을 리 없었다.

"육체에는 한계가 있잖아요. 아프면 모든 게 힘들죠.연주할 때 불편하지 않고 항상 갖고 다니면서 연습할 수 있는 악기를 연구하다 만들게 됐어요. 소리가 작아 연습도 편하고 연결 잭을 꽂아 연주도 할 수 있잖아요. 뭔가를 만들어낸다는 건 정말 어렵더군요. 실패도 여러 번 했죠.만들어준다는 업체를 찾지 못해 베트남까지 갔습니다. 올해는 다행히 한국 업체를 찾아 만들게 됐어요. "

기타바 뒷면에 그의 이름과 함께 'ma de ink orea'라는 정체 모를 영문이 새겨져 있다. 뜻을 물으니 'made in korea'를 다르게 띄어쓴 글자라고 했다. 기타바를 처음 제작해준 베트남 업체가 고마워 '메이드 인 베트남(made in vietnam)'을 새겨 넣었더니 사람들이 '왜 베트남산이냐'며 얼굴을 찌푸리기도 했다. 한국에서 만들었는데 굳이 당연한 걸 쓰는 것도 우습고 글자가 있던 자리를 비워 놓기도 뭐해서 생각해낸 대안이라고 한다. 4년간의 혼이 담긴 악기를 어루만지는 그에게서 기타바에 대한 애정과 자신감이 동시에 묻어났다.

"성격상 큰 마케팅은 못하는데 기타 치는 사람들 모두에게 꼭 권하고 싶어요. 어깨를 편 상태에서 치는 기타바는 익숙해지기만 하면 몸에 어떤 무리도 오지 않는 '웰빙 기타'죠."

◆기타 잡을 때 마음은 11세 때와 똑같아

그는 열한 살 때 형과 누나가 연주하는 클래식 기타에 반했다. 중학교 때는 일렉트릭 기타에 빠져 팝송,가요,록을 다 좋아하다 클래식 음악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음악을 만들며 스튜디오에서 일하고 싶었던 시절 조동익 씨와 함께 그룹 '어떤날'을 결성했고,앨범을 두 장 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클래식 음악에 대한 동경을 안고 유학을 떠났다.

잠깐 있으려고 간 유학이었지만 빈에서 6년,미국에서 4년을 공부했다. 오스트리아 빈 국립음악대 기악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뒤 미국 피바디음악원에서 전액 장학금을 받으며 공부했고 클래식 기타 연주자로는 최초로 NGSW/D'Addario 기타 콩쿠르(1997년),예일 고든 콩쿠르(1998년)에서 우승했다.

미국에서는 4년간 오로지 클래식에만 매달렸다. 지도교수였던 줄리언 그레이가 미국에서 클래식 연주가로 남으라고 권했지만 그는 한국에서 할 일이 남아 있다는 판단에 2001년 귀국했다. 귀국 공연 '내가 그린 기타 그림'을 열었고 이후 코리안심포니,유라시안필하모닉,KBS교향악단과 협연했다. 애니메이션 '마리이야기'를 시작으로 영화음악과 인연을 맺었고 작곡가,기타리스트,영화음악 감독으로 지평을 넓히며 '영화음악의 황금손'이란 별명을 얻었다.

"지금까지 기타로 먹고 사는 것에 매일 감사하죠.'기타 쳐서 뭐 먹고 살래'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았으니까요.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사는 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해요. 기타를 잡을 때 마음은 10대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어요. "

◆자연 담은 다큐멘터리 음악에 매료

'왕의 남자' '괴물' '장화홍련' '마더' '해운대' 등 스무 편이 넘는 영화에서 작곡,편곡,프로듀싱 능력을 발휘해온 그는 요즘 다큐멘터리 음악 작곡에 심취해 있다. 아름다운 영상의 자연 다큐멘터리를 보며 음악을 만드는 과정이 너무 행복하다고 했다.

"누가 누굴 찔러 죽인 다음 장면에 나올 음악을 생각하고,스토리 흐름에 맞춰 장대한 오케스트라 음악을 고민하다가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담은 다큐멘터리 음악을 하니까 더없이 행복해져요. "

최근에는 명품 브랜드 까르띠에의 새로운 향수 '베제 볼레' 광고 음악에 영화 '장화홍련' OST 중 '돌이킬 수 없는 걸음'이 삽입됐다. 한국 음악으로는 최초로 명품 브랜드 광고에 쓰인 것이다. "어느 날 까르띠에 광고 담당자로부터 이메일이 왔더라고요. 제 음악을 광고에 쓰고 싶다고.요즘 그런 문의가 자주 오는데,어떻게들 알았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

그는 이번 공연에 루시드 폴,정재형(12일),성시경(13일) 등 후배 음악가들을 초대 손님으로 불렀다. 브라질 퍼커셔니스트 발치뇨 아나스타시오도 함께한다. 1부는 영화음악 중심이다.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 'MBC 다큐멘터리 황하 주제곡' 등을 연주한다. 2부에서는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마리이야기' '가을시선' '돌이킬 수 없는 걸음' '한강찬가' 등 그동안 연주되지 않았던 곡들로 꾸민다. 기타는 4~5대 쓴다. 그가 만든 기타바도 그중 하나다.

◆아직도 꿈 많은 느림보 기타리스트

그는 "마흔 살 이후 나보다는 남을 생각하고 주변의 것들을 더 돌아보게 됐다"고 했다. 지난해부터 성신여대 현대실용음악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더 많은 사람들에게 기타의 즐거움을 알려주려 노력한다. 스스로는 '게으르고 수동적이고 느긋한 사람'이라고 평가하지만 그동안 맺은 결실과 앞으로의 꿈은 크다.

◆"막막해하는 꿈 많은 기타리스트들 도와주고 싶어"

"학생들이 백지 상태에서 모든 걸 흡수하는 모습을 보면 기분이 좋죠.책임감도 더 커지고,다 자식같고 그렇습니다. 꿈이 참 많을 때인데 기타리스트로서의 꿈은 여러 가지 사회적인 이유로 꺾일 때가 많아서 안타깝기도 하지요. "

요즘은 일반인을 상대로 한 마스터 클래스를 준비하고 있다. 마음은 당장 내일부터라도 시작하고 싶지만 바쁜 일정 때문에 오래도록 미뤘다.

복지법인 한국근육병재단과 함께 20여년째 자선공연을 해온 그는 "1주일에 한 번씩 마스터 클래스를 열고 싶다. 지방에서 올라와 쉽게 음악을 배우고 싶은 사람에게 진로를 카운슬링해주는 프로그램도 만들고 있다. 막막해 하는 꿈 많은 기타리스트들을 도와주고 싶다"고 말했다.

1년에 4~5편의 영화음악을 만들어내던 그도 중년이 되면서 생각이 조금씩 바뀌었다.

"누구나 그렇겠죠.일단 공인이 됐으니 더 많은 이들에게 따뜻한 마음으로 대하고,더 많이 책임지고 돌보고 싶어요. 혼자 만들어내는 일을 즐기고 좋아하지만 젊을 때 그런 시간을 마음껏 가졌다는 것에 만족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쉽고 즐겁게 기타를 배우면 좋겠어요. "

◆변하지 않는 입맛만큼 담백하고 욕심 없이

기타 외길을 걸어온 우직한 성격만큼 그의 입맛이나 스타일도 크게 변한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검은색 티셔츠를 즐겨 입고,정감 있는 수염에 안경을 낀 외모도 거의 그대로다. 최근에 바꾼 빨간테 안경이 흰 피부와 대비된다.

"잘 어울리나요? 여러 안경을 두고 고르는데 '남들이 제일 안 사가는 것'을 달라고 했어요. 검은색을 좋아하지만 이젠 좀 야한 색의 튀는 것에도 눈이 가더라고요. "

채소 토마토 스파게티를 즐기는 그의 입맛에 한식은 평양냉면,커피는 에스프레소,와인은 피노 누아가 딱이다. 그는 "유럽 유학 시절 와인을 마시게 됐는데,반 병 정도면 딱 좋은 수준"이라고 말했다. "와인 이름까지 기억하며 마시지는 못합니다. 신맛이 강하고 드라이한 피노 누아를 주로 마시죠.한번에 많이 못 마시고 매일 조금씩 마시는 편이에요. "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그가 레스토랑 옆에 있는 자신의 기타바숍으로 안내했다. 깔끔하고 자연스러운 인테리어,키 큰 선인장 하나와 회색 벽,짙은 하늘색으로 페인트 칠을 한 문틀.기타바 여러 대가 걸려 있는 벽을 배경으로 앉아 그가 연주를 시작하자 지나가던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 이병우의 단골집 트라토리아 모로
이탈리아 가정식 레스토랑…메뉴는 "알아서 해주세요"

서울 삼성동 선릉공원 옆에 있는 트라토리아 모로(Trattoria MORO)는 이탈리아 가정식 전문 레스토랑이다. 200여종의 와인을 갖춘 이곳 셰프는 장충동의 이름난 이탈리안 레스토랑 '그안'에서 10년간 대표 겸 셰프로 일한 김인수 씨.18년 경력의 그가 가장 좋아하는 주문은 "알아서 해주세요"다.

4개월 전 문을 연 이 식당에는 고정 메뉴가 별로 없다. 그날 그날 식재료의 종류와 신선도에 따라 달라진다. 계절별로 가을에는 홍합,겨울에는 굴을 재료로 한 음식이 많다. 집처럼 아늑하고 아담한 공간이지만 빵 하나도 직접 구워내고 파스타 면도 직접 뽑아내느라 4명의 셰프는 하루종일 전쟁을 치른다.

깻잎 리조토를 곁들인 송아지 정강이찜(2만8000원),팬에서 구워낸 최상급 와규 등심(5만4000원),깍지콩과 파마산 치즈를 곁들인 모둠 버섯구이(1만6000원),청양고추와 이탈리아 건고추로 만든 매운 펜네(1만7500원),신선한 낙지와 갑오징어 먹물리조토(2만2000원) 등을 추천한다. (02)556-6997~8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