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보대행사에 근무하는 고 대리는 얼마 전 소개팅을 생각하면 아직도 한숨부터 나온다. 약속시간이 40분이나 지나도록 전화 한 통화 없는 무개념 소개팅남.콧김을 씩씩거리며 일어서려던 순간 그가 도착했다. 도끼눈으로 흘겨보며 한마디 쏘아 붙이려던 참인데,그가 "오래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는 말과 함께 명함을 내밀었다. 그때 낮은 탄성과 함께 고 대리의 입에서 흘러 나온 말."아니에요,기자님.저도 방금 도착했는데요. 많이 바쁘시죠." 비즈니스 파트너인 기자에게 싹싹하게 대하던 고 대리의 평소 모습이 소개팅 자리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제 스스로도 방긋 웃으며 목소리까지 낭랑해지는 모습에 한숨이 나왔어요. 이것도 직업병 인가요?"

◆회사에서 '乙'은 집에서도 '乙'?

총무과에서 의전을 도맡고 있는 진 과장은 휴가지에서 '직업병'이 발동했다. 평소 임원들의 차종과 번호를 줄줄 외우고 다니는 그가 휴가지 콘도에서 회사 임원의 차를 발견한 것.잔뜩 긴장한 그는 가족들을 제쳐두고 곧바로 확인작업에 여념이 없다. 회사에 여러차례 전화를 건 끝에 해당 임원의 차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차번호 맨 뒤 네 자릿수와 차종 및 색상까지 같았지만,앞자리 지역번호와 차용도를 나타내는 '가나다…'는 다른 전혀 딴 사람의 차였다. 진 과장은 그날 저녁 내내 부인에게 바가지를 긁혀야 했다.

영업부서에 있는 신 과장은 평소 습관 탓에 남편에게서 핀잔을 들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공손함이 체질이 되다보니 어디서든 '영업용' 미소가 흘러나온다. 그는 "엘리베이터에 같이 탄 앞집 꼬마에게 영업용 미소와 말투로 얘기하는 걸 보고선 남편이 '소름 돋는다'며 놀리더라"고 했다.

◆비데 개발하다 장염 걸려

비데 제조 업체에 다니는 윤 과장은 새로 개발한 비데 탓에 병원 신세를 졌다. 살균테스트를 위해 대장균을 변기에 발라 놓고 여러차례 몸소 실험하다 장염에 걸린 것."이건 직업병을 넘어 솔직히 산재에 가깝죠." 노총각인 그는 유아용 비데를 만들 땐 뽀로로 만화 주제가를 술술 외우고 다녀 '아기 아빠 아니냐'는 의심을 받기도 했다.

같은 회사의 박 연구원은 음식물 처리기를 만들다 '변태'로 몰렸다. 새 제품의 냄새 체크를 몇 달 동안 담당하다보니 어디에서든 냄새를 맡는 버릇이 생겼다. 하루는 만원 지하철에서 음식물 냄새에 코가 '무조건 반사'하듯 '킁킁'거렸다. 그리고 10초 뒤 그에게 돌아온 것은 "아저씨 변태야?"라는 비명과 따귀 한 대였다.

성형외과에서 코디네이터로 일하는 민 대리는 다른 사람의 얼굴을 보는 게 부담스럽다. 일이 일이다보니 낯선 얼굴을 보면 눈,코,입,턱으로 나눠 견적을 내는 게 생활화됐다. 민 대리는 "얼마 전엔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거기가 하필 여고 앞이었다"며 "수업을 마치고 학생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무심코 휴대폰을 꺼내 계산기를 켜고 있는 내 모습에 스스로도 당황했다"고 한숨을 쉬었다.

◆"아저씨,30ℓ 주세요"

다른 사람들은 이해 못하는 남모를 고충도 있다. 비서 5년차인 강 대리는 백 스텝이 문제다. 매일 임원들을 마주하다보니 엉덩이가 안 보이게 뒤로 걷는 게 습관이 됐다. 강 대리는 "집에서 어머니랑 얘기하고 나올 때도 뒤로 걷는다"며 "솔직히 결혼한 뒤에도 이럴까봐 걱정"이라고 말했다.

올초 은행에 들어간 신입행원 노씨는 말투가 바뀌었다. 창구에서 손님들을 대하다보니 웃는 얼굴과 존칭이 익숙해졌다. 최근엔 택시비를 내고 평소 은행에서 고객에게 하던 대로 "5000원입니다. 맞는지 확인해보시겠어요?"라고 말하고선 기사의 당황한 표정에 얼굴이 빨개졌다.

정유사 직원인 이 과장은 주유소에 갈 때마다 주유원들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3만원''5만원'이라고 가격을 얘기하거나 '가득'이라고 말하는 다른 손님들과는 달리 이 과장은 늘 '10ℓ''30ℓ'와 같이 양으로 주문한다. "평소에 배럴이나 ℓ를 많이 써 주유소에서도 자연스레 그렇게 주문하게 돼요. "

◆드라마보다 간접광고(PPL) 챙기기

직업병이 삶의 재미를 막는 경우도 심심찮게 있다. 홍보회사에 다니는 심 대리는 도통 드라마에 집중을 못한다. 각종 PPL을 집행하다보니 드라마를 보면서도 어떤 브랜드가 협찬을 했는지가 가장 눈에 먼저 들어오기 때문이다. 심 대리는 "남들이 노래에 신경 쓰는 오디션 프로그램을 보면서도 우리 제품은 얼마나 자주 노출되는지,다른 회사 제품에 비해 비중이 어떤지에 더 신경이 쓰인다"며 "남편과 드라마를 보면서도 '저 회사는 얼마나 냈을까'하는 얘기를 나누곤 한다"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광고대행사 직원 성 대리는 여자친구에게 프레젠테이션으로 프러포즈를 했다. 여자친구가 왜 결혼해야 하는지를 논리적으로 풀어 평소 광고주에게 제안하는 것처럼 설득했다. 성 대리는 "광고맨들 사이에선 효과적인 방법으로 알려져 있다"며 "물론 여자친구의 표정이 안 좋아지려는 찰나 바로 이어서 여자친구를 위한 이벤트를 열었다"고 땀을 닦았다.

소비재기업 총무팀에 근무하는 이 과장에겐 'MC병'이 있다. 회사 내 거의 모든 행사에서 마이크를 잡다보니,사석에서도 습관이 그대로 나온다. 부서회식,동문회,동호회 번개모임에 이르기까지 한두 잔 술이 들어가면 어느 새 이 과장이 MC를 맡아 게임진행,벌칙 지정,회비 징수에 소감 발표까지 주도하고,회계담당까지 지명해 술과 안주의 수량도 세도록 한다. 얼마 전 아들의 돌잔치에서는 업체에서 소개해준 이벤트 진행이 신통치 않자 본인이 직접 마이크를 잡아 하객들에게 즐거운 추억을 선사했다고.

조재희/고경봉/강유현/강영연 기자 joyja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