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세대의 여성 과학기술자를 위해 뭘 할 수 있을지 고민해 온 과학자가 있다. 스스로가 성차별의 벽에 많이 부딪쳤던 까닭에 후배들은 이런 일을 겪지 않기를 바랐다. 이런 한 여성 과학자의 뜻이 대한여성과학기술인회(KWSE)를 탄생시켰다. 그의 발걸음은 세계여성과학기술인회(INWES) 회장직까지 이어졌다. 이공주 이화여대 약학과 교수(56 · 사진) 얘기다.

이 교수는 1993년 만들어진 KWSE의 창단멤버다. 1977년 이화여대 약학과를 나와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생화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6~2007년에는 KWSE 회장직을 맡았다. KWSE는 1300여명의 국내 여성 과학자가 가입한 단체로 교육훈련과 커리어 개발 등을 도와 여성 과학자의 지위를 향상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는 "박사학위를 따고 1988년 귀국한 뒤 일자리를 찾으면서 성차별을 경험했다"며 KWSE를 만든 계기를 설명했다. 유학시절 함께 공부한 남편은 국내 한 연구소에 선임연구원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이 교수가 원하는 연구소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박사 후 과정'을 이수해야 한다는 조건을 붙였다. 그는 이 조건을 거부하고 1년을 무직으로 보냈다. 우여곡절 끝에 1989년 한국표준과학연구원(KRISS)에 선임연구원으로 들어갔고 변화를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에 KWSE를 조직했다.

이 교수는 지난달 19~22일 호주 아델라이드에서 열린 제15차 세계여성과학기술인대회(ICWES) 총회에서 제3대 INWES 회장으로 선출됐다. INWES는 2002년에 결성됐다. 60개국에서 25만명이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단체의 결성 목적은 KWSE와 같다. 여성 과학자의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한 이 교수의 활동무대가 한국에서 세계로 넓어진 것.

이 교수는 "활동 범위가 크면 회원들이 단합하기가 어려워 자칫 아무것도 못하고 끝나는 수가 있다"며 INWES 회장을 맡은 것에 대해 긴장하는 눈치였다. 때문에 보다 작은 범위의 활동에 주력하는 '선택과 집중'을 할 계획이다.

이 교수는 "INWES 회장 임기동안 아시아 · 태평양 지역 여성 과학자 모임인 'APNN' 활동에 힘을 쏟을 것"이라고 말했다. APNN은 3년 전부터 준비작업을 해 올해 결성된 INWES 산하 단체다. INWES가 새로운 체제를 시작하려는 찰나에 이 교수가 APNN의 성공 여부를 책임져야 하는 위치에 올랐다. 그는 "APNN이 성공적으로 활동하면 다른 곳에도 지역 네트워크를 만들겠다"고 설명했다. "이미 아프리카 여성 과학자들이 지역 네트워크를 설립하자는 원칙에 합의했고 중동 지역 여성 과학자들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 교수는 "여성 과학자 수가 갈수록 많아지고 있기 때문에 이를 뒷받침하는 사회 시스템이 마련돼야 한다"며 "지금 여성 과학 지도자들이 다음 세대를 위해 희생하는 게 있으면 조금씩 좋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내가 KWSE를 조직했던 것처럼 후배들도 사회에 기여하는 바가 하나씩 있었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양병훈 기자 h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