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박눈이 내렸다. 그의 웃음도 함박꽃 같았다. 세계적인 재즈 뮤지션 나윤선씨(41).그에게 2010년은 '최고의 해'다. 지난 9월 30개국에서 동시발매한 7집 앨범 '세임 걸(Same Girl)'이 프랑스 재즈 차트에서 4주 연속 1위를 차지했다. 프랑스와 독일 아이튠즈 차트에서도 2,3위에 올랐다. 동양인 최초의 진기록이다. 유럽 투어를 마치고 지난달 귀국,LIG아트홀의 '나윤선 레지던스'와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무대를 빛낸 그를 서울 강남구 신사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4주 연속 1위에 오를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프랑스 사람들도 놀랐다면서 '기적'이라고 해요. 프랑스 최고 음반 판매망인 프낙(FNAC)의 판매 담당자들이 이메일을 보냈더군요. 음반이 좋다고.더 재미있는 건 '미국 가수가 아니라 당신이 1등해서 너무 기쁘다'는 표현이었어요. 보통은 유니버설에서 나온 미국 여가수 음반이 1등을 차지하거든요. 프랑스 사람들이 미국을 별로 안 좋아하잖아요. 또 제가 소속된 액트(ACT)가 독일 레이블이어서 더욱 놀랐다고 하는데,가장 듣기 좋은 말은 '항상 나오는 그런 류가 아니라 당신만의 독특한 음악이어서 정말 좋다'는 거였죠."

이 앨범은 아프리카 민속악기 칼림바를 연주하며 부른 '마이 페버리트 싱스(My Favorite Things)',포크 가수 잭슨 프랭크의 명곡 '마이 네임 이스 카니발(My Name is Canival)' 등 11곡을 나윤선 특유의 창법으로 녹여낸 것.라이브 공연하듯이 한번에 녹음해서 더욱 맛깔스럽다.

프랑스 파리뿐만 아니라 전 지역의 프낙 매장에서 그의 음반이 가장 좋은 자리에 배열돼 있다. 그는 '너무나 감동적인' 이 모습을 휴대폰에 사진으로 담았다. "제 인생의 처음이자 마지막인 것 같아서요. (사진을 보여주면서) 부모님이 이걸 보고는 아 우리딸이 뭔가를 하긴 하는구나 하셨죠."

그의 아버지는 한양대 음대 교수를 지낸 나영수 국립합창단장이고 어머니는 국내 뮤지컬 1세대인 성악가 김미정씨다. "음악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는 어려서부터 알았어요. 아버지가 새벽 3시까지 공부하는 걸 늘 봤거든요. 제가 고3 때도 저보다 더 오래 하셨죠.어머니도 연습을 많이 했어요. 어떤 날은 무대에서 다쳐서 귀가하기도 했고….이제 저도 좀 알 것 같아요. "

그는 남보다 늦은 스물여섯 살에 재즈를 처음 접했다. 그것도 뮤지컬을 거쳐 우연히 만난 장르였다. 건국대 불문과를 졸업하고 기업 홍보실에서 일하다 '카피 쓰는 일에 자신이 없어' 회사를 그만둔 그가 친구의 권유로 뮤지컬 '지하철 1호선' 오디션을 봤는데 덜컥 붙어버렸다. 처음엔 뭐가 뭔지도 모르고 무대에 올랐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음악 공부를 제대로 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파리로 훌쩍 떠났다.

"재즈 공부도 친구 말 듣고 시작했죠.파리 시내 북쪽에 있는 재즈학교 CIM에서 공부했는데 하나도 모르겠더라고요. 그때까지는 재즈를 들어본 적도 없는 '맹탕'이었어요. 즉흥이라는 개념도 생소하고 뮤지션 이름도 모르고….동양인은 한 사람도 없었어요. 재즈는 아프리카와 미국,유럽인들이 만든 거잖아요. 그런데 동양인이 재즈를 한다니까 얼마나 한심했겠어요. 프랑스가 자존심이 센 나라이기 때문에 그 서클에 들어가려고 노력도 많이 했죠.그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제가 한국인의 정체성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이름도 바꾸지 않았고 외국 가수 흉내도 내지 않았죠."

유럽 평론가들이 그의 음악을 '가장 신선하다''그동안 없었던 소리다'라고 평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인간의 목소리는 다 다르죠.그런데도 사람들은 자기 목소리로 할 생각을 잘 못해요. 사라 본,빌리 홀리데이를 따라하려 해요. 우리는 그러면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제가 영어,이탈리아어,프랑스어 등으로 부르지만 '윤선 나'만의 소리로 해야 의미가 있지요. "

이 같은 음악 정신을 갖고 있었기에 그는 보베 국립음악원까지 졸업하고 1999년 생모르 재즈콩쿠르와 2005년 앙티브주앙레팽 국제 재즈페스티벌에서 대상을 받으며 주목받았다. 2007년에는 최정상 재즈 뮤지션만 서는 미국 뉴욕 재즈 앳 링컨센터에서 한국인 최초로 공연했고 지난해 프랑스 예술문화훈장인 슈발리에장을 받았다. 2008년 앨범 '브아야주(Voyage)'와 올해 나온 '세임 걸'은 프랑스 재즈 매거진인 '재즈맨'으로부터 'CHOC(최고의 앨범)'로 연속 선정됐다.

그러나 어릴 때는 아주 평범한 아이였다고 그는 말했다. 부모님이 음악을 해서 공연하는 모습을 자주 보긴 했지만 음악의 길을 가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는 것.그러나 그는 끊임없이 레퍼토리를 바꾸는 아버지와 뮤지컬 무대에서 온몸을 던지는 어머니로부터 많은 선물을 받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것은 귀 훈련을 많이 했다는 거예요. 노래를 부르고 연주를 하는 것 이전에 귀가 먼저 열려야 하는데 어릴 때부터 '듣는 훈련'을 자연스럽게 한 거죠.재즈는 즉흥적인 요소가 강해서 내 소리만 내서는 안됩니다. 상대방이 이렇게 던지면 요렇게 받아야 하고 나도 거기에 맞춰 또 던져줘야 하고….그런 게 중요하기 때문에 '귀 훈련'부터 미리 시켜주신 부모님께 참 감사해요. "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소리를 찾아가는 여행이 더욱 깊고 넓어진다고 했다. 영원히 계속해야 하는 것이지만 나이가 들수록 좋아지는 숙제 같은 걸까. "음악이라는 것은 시간이 많이 걸리죠.대가들은 꼭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저도 처음에는 몰랐어요. 제가 졸업한 CIM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기회가 있었는데 '평생 걸릴지 모른다'고 말해줬지요. 존경받는 분들은 한 길을 오래 걸어온 사람이고,갈 길은 늘 먼 법이죠."

그의 '아리랑 이론'도 그렇다. "아리랑 노래만 하면 항상 눈물이 나요. 어떻게 그런 가사를 쓸 수 있었을까 하고요. 그 노래를 부르면 외국 사람들도 똑같이 느낀다고 해요. 그분들이 듣고 울어요. 폴란드에서 공연하는데 러시아 여자가 고향 생각이 나 듣는 내내 울었다면서 자기 나라에도 아리랑이 있다는 거예요. 그런 류의 멜로디가 어느 나라에나 조금씩 있다는 걸 알았죠.음악의 힘이라는 게 참 위대하구나. 아리랑에도 다양한 박자가 있는데 3박자가 주를 이루지요. 강원도는 5박자에 가깝지만….전 세계에 공통적으로 3박자가 있습니다. 깊이 들어가면 동유럽 민속음악은 11박자까지 있고요. 정말 좋은 음악은 늙지 않는 거라고 생각해요. 비틀스가 그렇고 민속음악이 그렇고…."

그는 음악을 여행에 자주 비유했다. "노래할 때 시작이랑 끝은 정해놓지만 중간은 어떻게 될지 저도 몰라요. 즉흥 연주는 나와 상대방의 상태,공연장의 에너지가 영향을 주고 받는 행위죠.늘 오늘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여행과 같죠.여행은 또 만남이죠.그리스에 가면 비행기에서 내려 현지인부터 만나고,거기서부터 그리스 노래를 듣고,말을 듣고,공연장에서 새롭게 사람들을 만나고,이런 것들이 다 여행이지요. "

그는 또 재즈를 톨레랑스(관용)로 설명했다. "재즈하면서 가장 달라진 게 남을 받아들이는 것이었어요. 하고 싶어도 못하는 게 있고,용납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것들도 많았는데 이젠 달라요.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관용,톨레랑스라는 게 있잖아요. 그 누구와도 할 수 있기 때문에 좋은 것,스승과 제자가 함께 무대에 설 수 있고,어느 나라 청중과도 곧바로 음악의 뜨거움에 빠져들 수 있는 것 그게 재즈인 것 같아요. "

만난사람=고두현 문화부장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