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계산(해발 505m) 자락 옥룡사지 동백나무숲(천연기념물 제489호)을 찾아간다. 옥룡사지로 오르는 길 양쪽 산기슭은 온통 동백나무숲이다. 이곳에 처음 동백나무를 심은 이는 도선국사라고 한다. 옥룡사의 약한 땅 기운을 북돋우려고 동백나무숲을 조성했다는 것이다.

나무데크를 따라 동백숲을 거닌다. 이곳의 동백은 3월 말에야 꽃이 피는 춘백(春栢)이다. 꽃 진 지 오래인 동백숲에는 까닭 모를 적막감이 서려 있다. 문득 '그대를 누구보다도 사랑한다'는 동백의 꽃말을 떠올린다. 사랑을 여의면 깊은 상실감이나 적막감에 빠지는 건 사람이나 나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봉오리째 뚝 꽃을 떨어뜨리는 동백나무의 상실감이야 오죽 크겠는가. 숲이 품은 적막감이 나그네의 가슴에 슬그머니 그늘을 드리운다.

동백숲 한가운데 빈터엔 작은 주춧돌들과 깨진 기왓장 무더기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이곳이 진정 '양고기가 있는 곳에 개미가 모여들듯,학인들이 사방으로부터 구름처럼 운집했다'는 '옥룡사 터'일까? 떠나는 나그네를 옥룡사지 고개 너머 높이 40m의 운암사 황동약사여래입상이 배웅한다. 오늘날 중생은 거대를 지향하는 병을 앓고 있다. 약사여래는 중생의 병을 고쳐주는 부처다. 중생의 병을 고치는 것도 좋지만 황동약사여래입상 자신의 병부터 고치는 게 어떨지.

어려워라,글 아는 자의 사람 노릇

향교를 거쳐 우산리 낮은 언덕에는 신재 최산두(1483~1536) 유허비가 있다. 봉강면에서 태어난 신재는 조광조와 함께 도덕정치를 논하다 기묘사화(1519년)에 연루돼 화순 동복에 14년간이나 유배당하는 고초를 겪었다. 비문을 쓴 순천부사 김약행은 '기묘의 일은 지금 까마득한 옛날의 뜬구름 같은 일이 되고 말았지만 여러 군자가 성취한 것은 금이 더욱 단련되고 옥이 더욱 정제된 것과 같아 연기와 불길 속에 녹아 없어지고 사라져버릴 수 없다'며 신재를 추모한다.

신재의 위패를 모신 봉양사가 쓸쓸히 지키는 유허비를 떠나 이팝나무(천연기념물 제235호)를 비롯한 몇 백 년 늙은 고목들이 숲을 이룬 유당공원으로 발길을 옮긴다. 왜구가 바다에서 광양읍성을 보지 못하게 하고 소금기 묻은 바닷바람을 막는 방풍림의 역할도 했던 숲이다. 높이 18m나 되는 이팝나무는 잔가지가 별로 없는 간결한 모습이다. 간결해야 바람을 잘 피할 수 있다는 삶의 지혜를 터득한 이 숲의 현자다.

봉강면 서석마을 문덕봉 아래 매천 황현(1855~1910)의 생가로 향한다. 경술국치(1910년 8월29일)를 당하자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 어렵기만 하구나(難作人間識字人)'라며 음독 자결했던 선생의 생가는 문간채와 안채밖에 없는 초라한 초가집이다. 구례로 이사하기 전,32세까지 이 집에서 살았다 한다.

안채 대청마루에 걸린 그의 사진을 바라본다. 두루마기에 갓을 쓴 매천은 지독한 근시였던 듯 도수 높은 안경을 걸친 채 약간 냉소적인 표정을 짓고 있다. 그의 유서에도 '내가 (벼슬을 하지 않았기에) 가히 죽어 의리를 지켜야 할 까닭은 없다'는 표현이 들어 있다. 그래도 그는 끝내 죽음을 택했다. '이 나라가 선비를 키워온 지 500년에 나라가 망한 날 선비 한 사람도 책임을 지고 죽는 사람이 없다면 (왕조가) 애통'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없었다면 누가 '조선 500년 봉숭아 학당'의 체면을 살렸을 것인가.

태인도 김시식지에서 해지는 섬진나루까지

1987년에 들어선 포스코 광양제철소의 거대한 위용을 바라보면서 태인도로 건너간다. 용지마을 입구에 세워진 김시식유래비를 일별한 후 궁기마을 김시식지로 향한다. 처음 김 양식을 시작한 사람은 김여익(1606~1660)이다. 그는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켰으나 조정이 청에 항복하자 궁기마을로 들어와 살다 우연히 바다에 떠다니는 나무에 엉긴 김을 보고 산죽과 밤나무가지로 지주를 세워 처음 양식을 시작했다.

그의 성을 따 '김'이라 고쳐 불렀다는 김의 본래 이름은 '해의'다. 내겐 전라도 사투리인 '해우'라는 이름이 훨씬 정답다. 어렸을 적,어쩌다 화롯불에 살살 구워 먹는 해우의 맛은 얼마나 고소했던가. 김 결속기 · 김 결속다듬도구 · 계량식 김통 · 계량식김발틀 등 김 생산 도구들이 전시된 유물관을 들여다본 다음 공의 위패를 모신 인호사 앞에 서서 잠시 묵념을 올린다. 내 육신은 그가 양식을 시작한 김에 신세진 바 크다.

덕유산이 보인다는 망덕산(197.2m) 아래 펼쳐진 망덕포구에는 윤동주 시인의 유고를 보존했던 국문학자 정병욱(1922~1982)의 옛집이 있다. 시집을 발간하려 했으나 일제의 방해로 실패한 윤동주는 후배 정병욱에게 원고를 맡긴 후 일본 유학을 떠났다. 유학 중 항일운동 혐의로 검거된 시인은 1945년 2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그러나 정병욱이 마룻장을 뜯어내고 그 안에 보관했던 유고는 1948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시집으로 출간돼 세상의 빛을 봤다.

1925년에 지은 정병욱 가옥(등록문화재 제341호)은 1970년대 시골 가게를 연상케 하는 함석지붕의 점포주택이다. 레일을 밀어야 열리는 유리문 너머로 뜯어 젖혀진 쪽마루가 훤히 들여다보인다. 아마도 정병욱이란 산파가 없었다면 윤동주 시인의 시는 세상에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포구에 서서히 산그늘이 내려앉기 시작한다. 건너편 배알도 해변 백사장 뒷숲 해송들의 그림자가 점점 짙어진다. 망덕산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배알도를 바라본다. 저 형상 때문인지 망덕산에 왕후장상의 터가 있다는 풍수지리설이 떠돌아 숱한 사람들이 명당자리를 찾으려 산을 헤맸다고 한다. 그런 사람들에겐 고은 시인의 '도선'이란 시가 제격이다. '어찌 그리 이 땅의 산수 귀하지 않은 데 없거늘/ 어디는 길하고 어디는 흉하더냐.'

광양과 하동을 잇는 섬진교를 지나 섬진 나루터에 닿는다. 전북 진안에서부터 550리 물길을 숨가쁘게 흘러온 섬진강이 막바지에 이르는 곳이다. 섬진나루 앞에는 4마리의 두꺼비 석상이 있다. 고려 때 왜구가 침입해오자 두꺼비 수십만 마리가 섬진나루터로 몰려와 울부짖었다. 그 소리에 왜구가 놀라 물러갔는데 그 후로 두꺼비 '섬' 자를 써 섬진강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전설을 형상화한 것이리라.

나는 두꺼비가 이뤘다는 군사적 업적(?)보다는 생태적 측면에 더욱 주목한다. 당시의 섬진강이 그렇게 많은 두꺼비가 살 만큼 완벽한 생태적 환경을 갖추고 있었다는 걸 시사하기 때문이다. 섬진강에서 은어,참게,가막조개 등을 쫓아내는 공해야말로 현대판 '왜구'다. 그저 섬진강이 '왜구'를 물리치고 국토의 젖줄로 영원하기를….

안병기 여행작가


맛집

국물 없이 석쇠에 굽는 광양불고기는 일미

광양은 재첩·은어·벚굴 등 입맛 당기는 먹을거리가 지천이다. 그중에서도 딱 한 가지만 고르라면 광양불고기를 꼽고 싶다. 이곳에 유배당한 선비들이 백운산의 숯막에서 숯을 가져다가 구워 먹었던 것이 유래가 됐다는 광양불고기는 여느 지방과 달리 국물 없이 양념을 바른 쇠고기를 석쇠에 구워 먹는다. '천하일미 마로화적(天下一味 馬老火炙)'이라 불리는 광양불고기는 사르르 녹을 만큼 연하고 맛있다. '마로'는 백제시대 광양의 옛 이름이다. 3대에 걸쳐 광양불고깃집을 운영하는 광양읍 삼대광양불고기집(061-762-9250)은 맛 좋고 정갈하기로 이름난 집이다. 불고기 1인분에 호주산은 1만4000원,한우는 2만8000원.

'음식이 입맛을 돋울수록 더 많이 소비되고,건강에 더 해롭다. 버터와 소금을 뿌리지 않은 팝콘보다 뿌린 팝콘을 두 배쯤 더 먹게 된다면,굳이 버터와 소금을 뿌릴 필요가 있을까? 아무것도 안 뿌린 팝콘을 적당량 먹다가 그치면 될 일이다'는 <<헬렌 니어링의 소박한 밥상>>의 한 구절은 식객이 기억해야 할 제1 계명이다.


여행 팁

백운산 수많은 계곡…더위 식히기엔 최적

한반도 남단 중앙부에 우뚝 솟은 백운산(1218m)에는 금천계곡·성불계곡·동곡계곡·어치계곡 등 계곡이 많다. 그중에서도 진상면 어치계곡이 가장 깊고 운치 있다.

20리에 이르는 원시림을 방불케 하는 계곡 곳곳에는 크고 작은 폭포와 소(沼)가 있으며 한낮에도 이슬이 맺힐 정도로 시원하다는 오로대가 있다. 더위를 식히기엔 더할 나위 없는 곳이다.

판단력이나 안목을 기르는 데 박물관보다 유용한 곳은 드물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여행이라면 광양읍 칠성리 장도전수박물관을 들르는 것도 고려해봄 직하다. 은장도로 잘 알려진 장도는 칼집이 있는 작은 칼이다. 선비들과 부녀자들이 주로 사용했는데 광양장도는 세종대왕도 차고 다닐 정도로 명품이었다 한다. 이곳에는 장도의 역사와 제조방법,중요무형문화재 제60호 박용기 옹이 제작한 장도 작품 등이 전시돼 있어 우리나라 장도의 아름다움과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061)762-48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