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제9번은 '크로이처 소나타'라는 별명으로도 유명하죠.이 작품에서 영감을 받은 러시아 문호 톨스토이가 같은 제목의 소설을 썼어요. 이 소설을 읽은 작곡가 야나체크는 질투 때문에 아내를 살해한 남자의 충격적인 이야기를 바탕으로 현악 4중주 제1번 '크로이처 소나타'를 작곡했습니다. 이처럼 인생이나 예술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새로운 의미를 재탄생시키는 과정이 아닌가 싶어요. "

23일 개막한 대관령 국제음악제의 예술감독이자 바이올리니스트인 강효 줄리아드 음대 교수(65).그는 이처럼 예술작품이 서로의 경계를 넘나들며 재창조된다는 점에 착안,올해 음악제 주제를 '크리에이트 & 리크리에이트(Create & Recreate · 창조와 재창조)'로 잡았다고 설명했다.

7년째 음악회를 이끌고 있는 그는 "알펜시아 리조트 내에 630여석 규모로 신축된 전용 공연장(알펜시아홀)에서 음악제의 대표 프로그램인 '저명 연주가 시리즈'와 '떠오르는 연주자 시리즈' 무대를 펼친다"며 "해발 700m 고지에서 세계 각국의 예술가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변화하고 발전하는 계기를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창조와 재창조의 의미는 다음 달 6일의 '크로이처 소나타' 외에 오는 30일 공연하는 '벤저민 브리튼을 추모하는 성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작곡가 아르보 페르트가 브리튼의 음악을 굉장히 흠모했는데 그를 끝내 만나지 못하고 그만 별세 소식을 들었죠.그 이후 이 곡을 썼습니다. '벤저민 브리튼을 추모하는 성가' 바로 다음에 브리튼의 '젊은 아폴로' 연주를 배치한 것도 이런 이야기를 공유하자는 의미죠."

내달 13일까지 강원도 대관령과 평창 등에서 열리는 이 음악제는 강씨가 세계 정상급 연주자들을 초대해 음악계의 흐름을 소개하고 음악학교를 통해 차세대 음악 거장을 키우는 대규모 국제 페스티벌.'대관령의 얼굴'로 불리는 첼리스트 알도 파리소와 정명화,젠왕을 비롯해 음악제에 애정을 쏟고 있는 엘마 올리베이라,로렌스 더튼 등 세계 정상 음악가들이 동참한다.

올해는 전용홀 건립과 함께 현악기 위주였던 음악학교에 피아노과를 신설해 교육의 폭을 한층 넓혔다. 음악도와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강의 '마스터 클래스',세계적인 음악가들로부터 음악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음악가와의 대화',9개국 160여명의 학생이 참여하는 '학생 음악회'도 마련했다.

평균 4만여명이 방문하는 대관령 음악제는 '저명 연주가 시리즈' 매회 매진,경제 유발 효과 140억원 등의 기록을 세우며 명실상부한 국제음악제로 자리잡았다. "2년 후에는 1300석짜리 공연장이 새로 완공됩니다. 사실 짧은 시간에 이 정도까지 왔다는 게 참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

그가 대관령 음악제와 인연을 맺은 것은 2000년대 초반.이미 1970년대 중반부터 미국의 세계적인 실내악 축제 '아스펜 음악제'에서 연주와 교육을 병행하던 그는 아스팔트도 깔리지 않은 시골 마을이 음악으로 유명해지고,거기에서 만난 제자들이 국제무대에서 성장하는 것을 보며 '이런 페스티벌이 우리나라에도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그때 강원도에서 연락이 왔어요. 동계올림픽 얘기도 나오고,평창을 문화도시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2003년 평창 문화홍보대사를 맡은 뒤 이듬해 대관령 국제음악제 음악감독으로 본격적인 축제를 시작했죠.물론 의사였던 아버지가 강원도에서 교편을 잡았던 인연도 있었지만요. "

그는 이번 공연의 추천 프로그램을 묻는 질문에 한참을 망설이다 "사실 모든 공연이 다 좋다"며 입을 뗐다. "새로 오는 아티스트로는 리제 드 라 살르(피아니스트)가 눈에 띄고 김선욱,신현수,조성진,강주미 등 유망한 한국 연주자도 다섯 명이나 참여합니다. 세계적인 스트링 콰르텟 연주도 들을 수 있어요. 기존 콰르텟은 다른 사람들과 현악 사중주를 하지 않는데 이번에 세계적인 콰르텟인 도쿄 콰르텟,에머슨 콰르텟 등의 멤버들이 모여서 특별히 공연하니까 볼 만할 것입니다. 음악제 위촉곡인 리처드 대니얼 푸어의 '축복 받은 자의 눈물'도 빼놓을 수 없죠."

그는 어릴 때부터 음악을 좋아하기는 했지만 요즘처럼 조기교육에 내몰리지는 않았다고 했다. "대구로 피란 가서 자랐는데 어린이 합창단에서 활동하며 독창도 많이 했죠.피아노는 초등학교 3학년 때인 열 살에 시작했어요. 그런데 하루는 아버지가 바이올린을 들고 왔어요. 먼 친척되는 분이 제 앞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데 소리가 너무 아름다워서 피아노 레슨은 가지 않고 바이올린만 퉁기곤 했죠.그렇게 바이올린을 하고 싶어하는 걸 보고 부모님이 시켜주셨어요. 초등학교 5학년 때니까 12세에 시작했군요. "

여름마다 '나폴리 송 듣고 아이스께끼 먹고' 자라던 그가 중학교 2학년 때 서울로 이사한 뒤에는 1주일에 한 번씩 온 가족이 새로운 레코드판을 들었다. "지금은 의사인 형님들도 다 음악을 좋아했죠.뉴욕에 사는 큰형은 바이올린,형수는 첼로,제 와이프가 바이올린,이렇게 해서 휴일이나 크리스마스 때 모이면 현악 사중주로 작은 실내악 콘서트를 열기도 해요. "

이 대목에서 그는 "음악도 자기가 좋아하고 정열을 쏟아야 한다"며 "부모나 타인의 권유라든지 다른 이유 때문에 악기를 연주하면 어느 정도 이상 못 간다"고 지적했다. "음악은 사랑하라고 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자기가 이해하고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해야,희망이 있다고 생각해야,진짜 잘 하게 되죠.그런 게 쌓이도록 도와줘야 해요. 대관령 국제음악제가 이런 역할을 해주면 참 좋겠다 싶습니다. "

그는 줄리아드에서 가르치던 한 학생 얘기를 들려줬다. "그 학생은 매주 5시간씩 차를 몰고와 레슨을 받았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빠지지 않았죠.그런데 하루는 눈이 많이 와서 사고를 당했어요. 앰뷸런스로 실려가는 그 순간에도 그 학생은 자기가 연주할 수 있는지 물었다고 해요. 그 얘기를 듣고 선생으로서 많은 생각을 했죠.8년 전 이야기인데,아주 연주를 잘 하는 학생이었어요. 이런 열정과 집중력만 있다면 뭐든 못하겠습니까. "



오프닝 공연서 '축복 받은 자의 눈물' 아시아 초연
29일부터 시작하는 '저명 연주가 시리즈'


대관령 국제음악제의 핵심 프로그램인 '저명 연주가 시리즈'는 29일부터 시작한다. 이 시리즈에는 첼리스트 알도 파리소와 정명화,젠왕 등 세계적인 아티스트가 참여한다. 22세의 피아노 요정 리제 드 라 살르와 5년 만에 복귀한 정경화 줄리아드 음대 교수도 만날 수 있다.

오프닝 공연에서는 음악제 위촉곡인 리처드 대니얼 푸어의 '축복 받은 자의 눈물'이 세종솔로이스츠의 연주로 아시아에서 초연된다. 이 작품은 모차르트의 진혼곡 중 모차르트가 생애 마지막으로 쓴 8마디를 바탕으로 작곡한 창작품이다.

30일 바이올리니스트 토트 필립스와 백주영씨 등이 연주하는 슈베르트의 '팔중주 F장조',31일 피아니스트 김선욱씨와 비올리스트 로렌스 더튼의 브람스 '비올라 소나타 F단조',진은숙 작곡의 '아크로스틱 문자놀이-일곱장의 동화'가 이어진다.

내달 1일에는 바이올리니스트 신현수씨가 이자이의 '바이올린 소나타 G장조'를 연주하고 첼리스트 정명화씨가 피아니스트 김선욱씨와 함께 라흐마니노프의 '첼로 소나타 G단조'를 들려준다. 5일에는 소프라노 유현아씨 등 7인의 앙상블이 푸어의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 1권'을 선사한다.

톨스토이의 동명 소설로도 유명한 야나체크의 '크로이처 소나타'는 6일,살르의 피아노 선율과 함께하는 쇼팽의 '발라드 4번 F단조'는 7일 들을 수 있다. '저명 연주가 시리즈'의 대미는 일요일인 8일 글룩의 오페라 '파리데와 엘레나' 중 '오 감미로운 나의 사랑',멘델스존의 '피아노 트리오 1번 D단조',비발디의 '사계'로 장식한다.

구체적인 일정과 티켓 예매는 홈페이지(www.gmmfs.com)와 클럽발코니(www.clubbalcony.com)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