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초기 영국에서는 부랑걸인들을 소재로 한 팸플릿 소설이 크게 유행했는데 이런 이야기도 있었다. 한 농장주가 양털깎기에 필요한 물건들을 사려고 장에 가다가 길에서 불쌍한 몰골을 하고 있는 한 남자를 만났다. 사정을 들어보니 길에서 강도를 만나 돈과 옷을 모두 빼앗기고 매까지 흠씬 맞아 제대로 거동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농장주가 그의 손을 잡아 부축해주며 돈을 좀 주겠다고 하자 그 불쌍한 사람이 이렇게 외쳤다. "제발 저에게 돈을 주지 마세요. 그걸 받으면 제 영혼이 죽고 맙니다. " 물론 돈을 더 받으려는 수작이었다.

또 팸플릿 소설로 이름을 얻은 하만이라는 사람은 출판업자의 아들을 시켜 걸인 한 사람을 하루 종일 미행하게 했다. 그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종일 길에서 구걸을 했다. 단 한번 자리를 떴는데 그건 점심 때 집으로 돌아가 얼굴 분장을 고칠 때뿐이었다. 분장은 다른 걸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피를 묻히거나 보기 끔찍한 상처를 만드는 것이었다.

밤에 작가와 출판업자가 걸인의 집을 급습하였더니 그 걸인이 가지고 있는 현금이 무려 14실링이 넘었다. 당시 노동자의 일당이 6펜스가량 되었으므로 이는 거의 한 달치 월급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이보다 몇 백배나 되는 돈을 모은 '전문 걸인'도 있었다.

이 밖에 마술,악기연주,노래,야바위 등을 주업으로 삼아 전국을 떠돌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마술 중에는 칼을 입 속으로 삼켰다가 다시 내 놓는 것,납 조각을 한 쪽 눈에 넣고 작은 막대를 이용해서 피부 안쪽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다른 눈으로 빼내는 것이 유행하였다. 코를 반으로 베었다가 순간적으로 복구시키는 것도 있었다. 이들처럼 구걸을 본업으로 삼거나 예술적 재능을 팔면서 전국을 떠도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떠도는 사람들 중에는 '일을 찾아서' 이동하는 노동빈민들도 있었다. 계절적인 요인에 의한 노동인구의 지리적 이동은 농업이 주를 이뤘던 근대 초기 경제의 본질적인 부분이었다.

산업 노동자들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불황이 닥치면 노동자들은 단기 통지에 의해 무더기로 해고되었다. 영세한 제조업자들이 경기 회복을 기대하며 유휴인력을 계속 고용할 수는 없었다. 이들 또한 일자리와 먹을 것을 찾아 움직여야 하는 인구집단에 자연스레 편입되었다.

영국의 헨리 8세는 부인을 여섯이나 둔 왕으로 유명하다. 우리에게도 소개됐던 영화 '천일의 앤'에 나오는 비운의 주인공 앤 볼린 등 두 명의 왕비는 참수형으로 죽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은 근대적 사회복지제도의 효시로 알려진 튜더 빈민법이 그의 치세에 만들어진 것이다. 1536년 만들어진 이 법은 구걸과 개인적 자선을 일절 금지하였다. 이는 국가 주도로 공적 자선을 시행하겠다는 의미였다. 이를 위해 구빈세(救貧稅)라는 강제적 세금이 신설되어 일정 재산 이상의 모든 가구에 누진적으로 부과되었다.

가장 의미 있는 정책 중의 하나는 노동능력이 있는 빈민들에게 정부가 공공사업을 통해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이는 빈곤의 원인을 보는 관점에서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예전에는 빈곤의 원인을 주로 개인의 도덕적 결함에서 찾았다. 빈민들에게는 나태,게으름,무책임,음주,도박,무질서 등의 꼬리표가 늘 따라다녔다. 여기에는 '일을 하려고만 들면 일자리는 늘 있다'라는 완전고용의 전제가 깔려 있었다. 그러나 튜더 빈민법의 창안자들은 일을 하고자 해도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이른바 '비자발적 실업'의 현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정부가 공공사업을 벌임으로써 실업자들을 고용하고 노인과 장애인 등 노동능력이 없는 빈민들에게 빈민수당을 지급하는 정책은 재정지출을 늘려 총고용과 유효수요를 끌어올리는 케인스 경제학에 다름 아니었다.

이 제도는 수백년 이어지다가 18세기 말 스핀엄랜드 제도로 진일보하게 되었다. 가구당 최저생계비를 설정하고 소득이 이에 미달하면 구빈세 재원에서 보충해주는 제도였다. 그리고는 이들의 취업을 지원하여 소득이 생기면 일부를 회수하였으며 때로는 지방 정부가 직접 공공사업을 일으켜 일자리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허구생 서강대 국제문화교육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