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 기업의 창업주가 1980년대 초 사망하자 아들A씨 등 자녀 세 명은 "아버지의 자필 유언장"이라며 종이 한 장을 제시했다. 유언장에는 '부동산을 정리해서라도 기업은 살려야 한다'며 부동산 대부분을 주요 계열사 3개사에 증여하겠다고 적혀 있었다. 창업주의 전처 소생인 이들은 창업주의 생전 유언장에 기재된 주요 계열사를 하나씩 물려받은 상태였다. 당시 세법상 영리법인에 유증된 토지는 상속세 면제 대상이었다. 이렇게 되면 창업주의 유족이 상속세를 내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세무서 측은 "유언장의 필적이 고인의 글씨체와 다르다"고 여겨 거액의 상속세를 부과하기로 했다. 이에 A씨 등은 창업주의 후처 B씨에게 "상속세를 내지 않는 게 집안을 살리고 자식들을 살리는 일이니 시키는 대로 증언해달라"고 부탁했다.

유언장의 효력 여부가 쟁점이었던 소송에 증인으로 출석한 B씨는 부탁받은 대로 "창업주가 주요 계열사에 토지를 유증하겠다고 말한 걸 들었다"고 증언했다. 그 결과 "대필이라 자필유언증서로서의 효력이 없다 해도,창업주의 생전 증여의사와 일치하므로 효력이 있다"는 판결이 나왔다. 이후 유족들 사이에 크고 작은 소송이 계속 벌어졌다.

결국 창업주가 사망하고 20여년이 흐른 뒤 창업주의 나머지 자녀들과 B씨는 주요 계열사를 물려받은 전처 소생 자녀 세 명을 상대로 "가짜 유언장에 따른 소유권 이전은 무효이므로,유언장에 적힌 부동산은 우리들 소유"라고 주장하며 소송을 냈다.

이들은 "유언장에 창업주의 자필 서명도 없으며,A씨 등의 관련 진술도 엇갈린다"며 "그동안 A씨 등이 우리를 배제해온 결과 유언장과 상속재산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반면 A씨 등은 "B씨 등은 공동 상속인으로 유언장의 존재를 알고 있었음에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아왔다"면서 "이는 유언장 내용(부동산 소유권 이전)에 동의했거나 상속을 포기한 것"이라고 맞섰다.

대법원 1부(주심 김영란 대법관)는 B씨 등에 대해 패소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최근 돌려보냈다. 재판부는 "B씨가 부탁받아 거짓 증언했다는 사정만으로는 B씨가 유언장의 위조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단정할 수 없다"며 "B씨의 허위 증언을 상속지분 포기 의사로 볼 수 없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또 "창업주 사망 후 수십년이 지나도록 침묵하다가 상속세가 면제된 후에야 이의를 제기했다 해도 신의칙에 반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원심에서는 정황상 B씨 등이 유언장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뒤늦은 주장은 신의칙상 받아들이기 힘들다며 원고 패소 판결했다.

이고운 기자 cca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