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과장은 업무상 외부 손님을 접대하는 일이 잦다. 술이라도 먹는 날이면 손님에게 택시를 잡아 준다. 출발하기 전 택시비를 기사에게 건넨다. '안녕히 가시라'는 인사를 하고 돌아서면서 후회가 앞선다. 얼마 되지 않지만 영수증이 없다. 오늘도 꼼짝없이 주머니 돈에서 손님 택시비를 부담해야 한다. '실적을 위해서'라고 자위해 보지만,그것도 한두 번이다.

직장 생활을 하다 보면 분명한 업무 때문인데도 개인비용을 써야 할 때가 적지 않다. 영수증이 없어서,업무비라는 걸 증명하기가 쉽지 않아서 등 이유는 가지가지다. 그럴 때마다 김 과장 이 대리들은 아픈 마음을 부여잡고 돌아선다. 그러다가 '금색'으로 번쩍이는 법인카드라도 받게 되면 상황은 달라진다. 개인적인 일에 별 죄책감 없이 카드를 긋고 입을 닦는 사람이 일부나마 생겨나게 마련이다. 회사에는 말 못할 직장인들의 경비 처리 기술(?)을 들어봤다.

◆해외출장 경비처리엔 택시 영수증 최고

중소기업에 다니는 김모 과장(35)은 2년 전 해외영업으로 옮긴 후 출장이 잦아졌다. 주변인의 부러움을 사는 건 당연했다. 김 과장도 해외출장을 즐긴다. 하지만 딱 한 사람 그의 해외출장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 다름 아닌 부인이다. 해외출장만 갔다 오면 목돈 수십만원이 깨져서다. 업무상 이유로 출장을 갔더라도 주변사람 선물 챙기랴,경비 처리가 되지 않는 각종 팁과 버스비 지하철비 음료수값 등 소소한 금액까지 따지고 나면 결국 적자다.

비행기 티켓값보다 추가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유럽의 저가항공사는 그에겐 쥐약이다. 한 번 결제하면 취소도,변경도 안 된다. 일정이 꼬이기라도 할라 치면 티켓을 두 번,세 번 사야 한다. 그런데도 비용은 한 장값밖에 청구하지 못한다. 그는 "해외출장을 간다는 것 자체가 공부이고 경험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크게 개의치 않는다"면서도 "아내에게만은 할 말이 없다"고 말했다.

대기업 해외마케팅팀에서 일하는 황모 과장(37)은 다르다. 그는 '영수증의 달인'으로 통한다. 출장이 잦은 그도 처음엔 김 과장처럼 예상치 못한 개인지출로 인해 적자에 시달렸다. 그가 찾아낸 방법은 택시 백지영수증.택시기사들에게 부탁해 금액난을 비워둔 영수증을 10여장씩 확보해 뒀다가 필요할 때 금액을 적당히 적어 넣는다. 해외 각국을 다니며 모아둔 영수증 덕분에 황 과장에게 'SOS'를 치는 동료들도 많다. 그는 "택시비가 비싼 영국이나 일본의 택시 영수증이 특히 인기가 많다"며 "카드 대신 현금만 받는 한인 민박집도 부탁만 하면 영수증 금액을 조금씩 부풀려 준다"고 귀띔했다.

◆영업사원에 기름값 영수증 주고 '반땡'

식비나 교통비를 경비 처리하기 어렵기는 국내서도 마찬가지다. 유통업에 종사하는 김영식 과장(34)은 거래처를 빈 손으로 만나러 가는 법이 없다. 근처 커피숍에서 커피와 케이크라도 사 가면 상대의 태도가 달라지는 것을 여러 차례 경험해서다. 문제는 돈이다. 재무팀 대리한테 머리 조아려 가며 8000원,1만원짜리 영수증을 처리해 달라고 매번 부탁하는 건 찝찝하기 짝이 없다. 김 과장은 "애들도 크는데 개인돈을 매번 쓰기도 곤란하다"며 "회사 후배들에게 쓴 돈은 개인 비용으로,외부인에게 쓴 돈은 회사 경비로 처리한다는 원칙을 나름대로 세우고 있지만 쉽지 않다"고 털어놨다.

영업사원이 아닌 경우엔 회사 일로 차를 몰 때도 기름값을 청구하기가 쉽지 않다. 서울 구로에서 IT(정보기술)기업에 다니는 김명훈 대리(31)는 "업무 상 이유로 차를 썼을 때 기름값을 받기 어렵다 보니 택시를 타고 영수증 처리를 하거나 여의치 않으면 동기 영업사원한테 주유비 영수증을 넘긴다"고 말했다. 영업사원은 공식적으로 기름값을 보조받으니 반반 나눠서 누이 좋고 매부 좋자는 전략이다.

◆참을 수 없는 법인카드의 유혹

신참 시절엔 상사들이 쓰는 법인카드만큼 부러운 게 없다. 자기 돈은 쓰지 않으면서도 생색은 생색대로 낼 수 있는 '요술방망이'나 다름없어 보인다. 그러나 어느 직장에나 법인카드를 잘못 쓰다 패가망신한 사례는 부지기수로 널려 있다.

출판업계에 다니는 임모 과장(34)이 그런 경우다. 임 과장은 영업직이다. 뛰어난 영업실적 덕분에 과장이지만 법인카드를 갖고 있었다. 재미있는 건 그의 주변에 여자가 끊이지 않았다는 점.

회사 사람들이 그의 '은밀한 매력'의 정체를 알게 된 건 그가 갑작스럽게 사직서를 내고 나서다. 법인카드를 멋대로 긁어대며 여자들에게 환심을 사다가 회사 감사에 딱 걸린 것이다. 그는 일부 가게에서는 많은 금액을 카드로 긁고 현금을 일부 돌려받는 '카드깡'도 서슴지 않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법인카드를 써야 할 때 안 쓰는 경우도 욕 먹기는 마찬가지다. 국내 한 대기업 마케팅담당 이모 상무(49)는 회사 내 소문난 '짠돌이'다. 마케팅팀장이 "오늘 저녁 팀 회식이 있다"고 전달하면 "회식비는 팀장이 내는 거지?"라고 물어온다. 어쩌다 팀원들에게 점심을 샀는데 돌아오는 길에 한 직원이 2000원짜리 테이크아웃 커피를 마시자고 제안했다가 "5000원짜리 밥 먹고 2000원짜리 커피 마시는 게 가당키나 하느냐"며 크게 면박을 당한 일은 두고두고 회사 내 화젯거리였다.

하지만 그가 모르는 일이 하나 있다. 다름아닌 부하직원들이 그의 '지극히 사적인' 법인카드 사용내역을 훤히 꿰뚫고 있다는 점이다. 박모씨는 "최근 이 상무가 가족과 밥을 먹거나 골프를 치고 법인카드로 결제한 사실이 알려졌다"고 말했다.

◆야근비 절반만,대신 프린터 좀 씁시다

야근수당 처리도 김 과장,이 대리들을 시험에 들게 하는 것 중 하나다. 밤 10시를 넘겨 일을 하더라도 매번 야근비를 타기는 눈치 보인다. 자칫하면 회삿돈만 축낸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일하고 돈도 받지 못하는 것은 억울하다. 중소기업 홍보팀의 이수영 대리(30)는 '50 대 50 원칙'으로 해결한다. 그는 "야근을 두 번 하면 한 번만 수당을 신청한다"고 털어놨다.

회사 비품을 개인 업무에 살짝 사용하는 애교 수준의 경비 축내기 기술도 있다. 대기업에 다니는 조민기 과장(40)은 목요일마다 야근을 자처한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의 숙제를 프린트하기 위해서다. PC방에선 장당 500원이나 받는 비싼 컬러프린트를 마음껏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 과장은 "동료들과의 대화에서 자녀들의 학교 과제물을 회사에서 프린트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됐다"며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생각에 죄책감을 덜었다"고 말했다.

이상은/이정호/김동윤/정인설/이고운 기자 se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