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 점검 결과…한달 전 마주치고도 검거 실패
납치 가능성 묵살한 형사들 오판도 문제점

초동수사의 소홀 등의 문제점이 불거졌던 부산 여중생 납치살해 사건의 처리 과정을 경찰이 자체 조사한 결과 곳곳에 허점이 많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사건 발생 한 달 전에 다른 혐의로 김길태를 잡을 수 있었으나 놓쳤고, 여중생의 납치 가능성을 언급한 지구대의 판단을 형사들이 묵살했다는 점에서 초기 대응이 부실투성이라는 기존의 평가가 경찰청의 점검을 통해 재확인 된 것이다.

이번 점검에서 나타난 부실수사 사례는 다음과 같다.

◇22세 여성 성폭행 초기 수사 때 김길태 놓쳤다 = 김길태는 여중생을 납치, 살해하기 한 달여 전인 1월23일 새벽 4시40분께 길 가던 여성(22)을 인근 건물로 납치해 성폭행하고서 자신의 거주지인 다세대주택 옥탑방으로 끌고 가 8시간가량 감금하면서 다시 2차례 성폭행했다.

이 여성은 같은날 오후 6시께 풀려난 뒤 2시간여 지나 성폭행 사실을 신고했으며, 경찰은 이 여성을 부산 동아대의 원스톱지원센터에서 조사를 받게 했다.

이어 이튿날 오전 0시20분께 담당 형사 2명은 피해 여성을 차에 태워 경찰서로 데리고 오면서 현장 확인 차원에서 김길태의 집에 들렀다가 그와 마주쳤다.

당시 형사는 김길태를 만나 "위층 사는 사람을 만나러 왔다"고 했지만, 김이 "나는 밑에 사는 사람이다.

소변보러 나왔다"고 말하자 검거하지 않았다.

점검단은 "담당 형사가 김길태의 얼굴을 몰라 적극적으로 검거에 나서지 않았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피해 여성이 원스톱지원센터에서 김길태의 인상착의를 모두 진술했을 텐데도 적극적으로 검거하지 않았다는 것은 선뜻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다.

김길태는 당시 형사와 마주친 직후 잠적했으며 사상구 덕포동 재개발지역의 빈집 등에 은신해 있다가 한 달여 만에 여중생을 납치해 성폭행하고서 무참히 살해했다.

◇"납치 아닌 단순가출"…형사의 오판 = 여중생 실종 신고 직후 형사들이 `단순가출'로 판단하는 바람에 초기 대응을 못 한 것도 점검단 조사 결과 새롭게 드러났다.

피해 여중생의 어머니한테서 실종 신고가 들어온 시간은 2월24일 오후 10시50분.
당시 현장에 먼저 출동한 지구대 지역경찰관들은 시력이 나쁜 피해자가 안경은 물론 휴대전화기도 놓고 집에서 사라진 점과 화장실 바닥에서 외부인의 것으로 보이는 운동화 발자국이 3∼4점 발견된 점 등으로 미뤄 `납치 의심' 보고를 했다.

하지만, 현장에 도착한 사상서 형사팀장 등은 이 사건을 단순 가출로 판단해버렸다.

피해자 주변 탐문을 한 결과 피해자가 평소 `엄마가 오빠만 편애한다'는 얘기를 자주 했다는 이유에서다.

이 때문에 형사팀장은 형사과장이나 서장 등 지휘부에 전혀 보고를 하지 않았고, 여중생 집 주변에서 초기 수색도 대대적으로 이뤄지지 않았다.

김길태가 피해 여중생을 납치장소에서 불과 50여m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성폭행하고 살해했는데도 지구대 경찰관의 납치 의심 보고를 무시한 형사들의 잘못된 예단 때문에 초기수사가 엉망이 된 것이다.

형사팀장은 다음날 오전 7시가 조금 넘어서야 형사과장에게 여중생 사건 관련 보고를 했고, 경찰은 그제야 납치 사건으로 수사를 진행했다.

◇ 형사들의 실적주의도 문제 = 수사가 엉망이 된 데는 형사들의 과도한 실적주의 근무 관행도 한몫했다.

지구대 경찰관이 납치가 의심된다고 판단했음에도 수사 전문가들로 자부하는 형사들이 단순가출로 단정한 데는 사건을 해결해봐야 평가점수가 그다지 높지 않다는 생각이 작용한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경찰 관계자는 "형사들이 사건 규모가 커져 업무가 과중해지는 것을 피하고자 무의식중에 단순가출에 무게를 뒀을 수 있다.

납치나 실종은 해결하더라도 평가점수가 높지 않아 동기부여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경찰은 이런 관행을 해결하고자 실종 사건을 접하면 현장 상황을 세부적으로 분류해 점수를 매긴 뒤 일정 점수를 넘기면 납치로 판단해 수사를 시작하는 진단표를 만들 예정이다.

일선 형사들의 시간외 수당을 현실화하고 실적평가 방식을 합리화하는 등 처우개선을 추진하는 한편 수사본부 설치대상이 되는 중요사건에는 초기부터 적극적으로 대응하기로 했다.

(서울연합뉴스) 박성민 기자 min76@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