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부터 5년간 한양대 의대 교수로 재직하던 이종철 삼성의료원장은 총 1500여마리의 닭을 잡았다. 후배 의사들은 매일 새벽 서울 경동시장에 나가 닭을 사서 실험실로 날랐다. 닭에 방사성 동위원소(테크니슘)를 주입한 뒤 닭의 간을 떼어 사람에게 먹인 뒤 음식물이 소화되는 패턴을 분석하는 실험을 진행했다. 먼지가 펄펄 날리고 냉 · 난방도 제대로 되지 않는 환경이었다.

당시엔 의대에서 이처럼 대규모 동물실험을 하는 게 드물었다. 구태여 이런 연구를 안 한다고 뭐라 하는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이 교수는 자기 돈까지 써가며 끈질기게 매달렸다. 후배 의사들은 그의 온화한 리더십에 불평 한마디 없었다. 산고 끝에 연구팀은 내시경,초음파,혈액검사로도 원인을 밝혀내지 못한 만성소화불량(위장관운동장애) 환자를 진단하는 방법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그가 1986년 미국 로체스터 의대로 연수갔을 때의 일이다. 공교롭게도 한 · 중 · 일 세 나라 유학생이 연구 경쟁을 벌였는데 일본 학생이 제출한 논문만 채택됐다. 자존심이 상한 이 원장은 한동안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이때 지도교수는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성경 구절을 들려주며 격려했다. 절치부심 끝에 이듬해 내놓은 논문이 미국 생리학회지에 게재됐다. 위장관호르몬에 의한 위산분비 억제 과정을 실험을 통해 증명한 세계 최초의 논문이었다.


대학에서 병원으로

이종철 삼성의료원장은 국내 소화관운동학의 선두주자다. 음식물이 뱃속에 들어가 규칙적인 위장관운동에 의해 잘게 부서지는 과정과 소화불량이 나타나는 경로를 규명하는 데 매진해왔다. 1994년 초 평생 연구자로만 살 것 같던 그에게 중대 제안이 들어왔다. 삼성서울병원 개원준비팀이 "연구에 충분한 인프라와 자금을 제공할 테니 새 병원의 소화기내과 과장으로 와달라"고 요청한 것.척박한 연구환경에 염증을 느끼던 그는 "원 없이 연구나 해보겠다"며 삼성행을 택했다. 지금도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추천으로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의 주치의가 됐고,병원의 차기 기획실장 자리도 약속받았다. 그의 인생이 바뀐 대전환점이었다.

2년 뒤 기획실장에 오른 그의 당면 과제는 삼성서울병원보다 5년 먼저 개원한 서울아산병원을 단기간에 따라잡는 일이었다. 아산이 삼성에 앞서 실력파 의사를 싹쓸이하다시피 한 탓에 삼성이 확보할 만한 인재는 그리 많지 않았다. '진단은 서울대 병원에서,수술은 아산에서,장례는 삼성에서'라는 당시 의료계 유행어는 듣기에 괴롭기 짝이 없는 언사였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뒷전인 채 해외연수를 다녀온 의사들은 선진 의료문화를 정착시킨다며 한 환자를 보는 데 15분 이상을 할애했다. 환자 적체로 기다리다 지친 중증 환자는 경쟁 병원으로 이탈하고,경증 환자는 검사를 너무 많이 해 병원비만 비싸다며 불만을 늘어놓았다. 진료의 양적 · 질적 지표가 도저히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혁명적 의료 서비스 개선을 내걸고 대대적인 친절 캠페인에 나섰다. 의료계 일각에선 삼성이 '진료 외적인' 문제에 신경쓴다고 비웃었다.


의료서비스 개혁의 첨병

이종철 당시 기획실장은 서비스 혁신의 첫 걸음으로 개원 때 선언했던 촌지 기다림 보호자가 없는 '3무(無)'병원을 정착시키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3시간을 기다려도 고작 3분 진료받는 게 당연시되고,환자가 오래 기다릴수록 명의이며,환자가 수술받기 전 촌지를 갖다주지 않으면 수술이 지연되기도 했던 관행을 깨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의사들이 촌지를 받지 못하도록 활동비로 쓸 신용카드를 지급했고,간호인력을 증원해 보호자가 상주하지 않아도 되는 병원을 만들었다. 맛없는 환자 식단도 개선했다. 더 많은 비용이 들었지만 내원객들의 만족도를 높이기 위한 불가피한 투자였다. 인근 협력병원에서 환자를 보내면 최우선으로 진단 · 치료 · 입원시키는 진료의뢰제도 도입했다.

암센터 심장혈관센터 등 센터 중심의 진료체제도 추진했다. 환자들이 여러 진료과를 돌아다녀야 하는 불편을 최소화하고 협진을 통해 최선의 치료를 해주자는 취지였다. 하지만 진료과별 '칸막이' 진료에 익숙해 있던 의사들은 역으로 환자를 찾아가서 진료해야 하는 시스템을 꺼려했다. 그는 반대 의견을 경청하고 대안을 제시하며 차근차근 후배 의사들을 설득해나갔다. 삼성암센터가 국내 암센터의 간판이 된 것도 이때 뿌린 씨앗의 결실이라 할 수 있다. 성과평가제도 도입도 마찬가지.진료를 어떻게 양적 질적으로 평가할 수 있느냐고 의사들은 반발했다. 그러나 업무성과를 기록하고 점수화했더니 의사들의 열의는 높아졌고 병원의 경영지표는 향상됐다.


이건희 前회장의 칭찬

오로지 삼성의료원의 성공만 생각하며 살았다는 이 원장.그에게도 개인적인 아쉬움은 있다. 자신이 의사이면서도 척추디스크로 고생하던 아내가 이런저런 치료법을 찾아 헤매는 줄은 몰랐다고 한다. 아내가 허리 수술을 받은 날에야 출장을 다녀와서 죄인처럼 병실을 찾았다. 이건희 회장으로부터 "병원 걱정하는 사람은 자네 밖에 없구먼" 하는 말을 듣던 시절이었다.

그는 5남 1녀 중 4남이다. 5형제 모두 서울대를 졸업할 만큼 어머니의 교육 열기는 대단했다. 맏형은 중학생 시절 아프다고 학교를 결석했다가 어머니에게 호되게 맞았다고 한다. 어머니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기도를 올리며 자녀들의 건강과 안녕을 기원했지만 정작 자신은 평생 위장병에 시달렸다. 소화기 계통을 전공한 이유는 순전히 어머니의 잦은 병치레 때문이었다.

이 원장은 온순하고 다정다감한 성격이다. 자기주장이 강하고 의학에만 밝은 상당수 의사와는 달리 유연한 사고를 하며 사회 다방면에 관심이 많다는 평을 듣는다. 의사이면서도 삼성 특유의 경영시스템을 빠르게 수용할 수 있었던 배경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삼성서울병원 출범 초기,많은 의사들은 사소한 결재를 받기 위해 기승전결식 기안서를 올려야 하는 번잡함을 참지 못했지만 그는 발전적으로 순응했다.

병원 업무를 비즈니스의 반열에 올려놓는 과정에서 나름대로 키워왔던 친화력도 큰 몫을 했다. 그의 스승인 최규완 전 삼성의료원장은 "이 원장이 레지던트일 때 환자를 가족 이상으로 자상하게 진료해 큰 감동을 받았다"며 "후배 의사나 직원을 구슬리는 재주도 보통이 아니다"고 말했다. 그와 의대 동기인 성상철 서울대 병원장은 "학창시절 드러나지 않게 동기들을 챙겼던 기억을 갖고 있다"며 "하지만 이 원장이 의료계 전체에 충격파를 준 혁신의 주인공이 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미래 비전은 '글로벌 비즈니스'

이 원장은 의사 중심,권위주의로 대변되던 한국의 의료문화를 환자 중심,고객만족으로 바꾼 변화의 주역으로 불린다. 요즘엔 의료산업 선진화와 의료관광 활성화의 전도사로 활동하느라 바쁘다. 과거에는 삼성 때문에 의사들의 위상이 낮아지고 서비스 개선 비용이 크게 늘어났다는 게 의료계의 푸념이었지만,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이 원장은 2015년까지 삼성서울병원을 '아시아 암 치료 허브'로 한 번 더 도약시킨다는 구상을 가다듬고 있다. 병원 서편 4만9500㎡ 부지에 100병상 규모의 외국인 전용병원과 보호자를 위한 비즈니스 호텔을 짓고,1000억원 규모의 투자를 통해 양성자치료센터도 건립할 계획이다. 의료사업 비전을 해외로 확장해 명실상부한 글로벌 비즈니스로 육성하겠다는 게 그의 꿈이다.

정종호 기자 rumb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