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관념 변화, 여성계 폐지론, 세계조류 영향
"피해자 민사소송으로 구제받기 가능"

형법 304조 혼인빙자간음죄 조항이 1953년 제정 이래 56년 만에 위헌 판정을 받으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

헌법재판소가 26일 2002년의 합헌 결정을 뒤집고 혼인빙자간음죄를 위헌으로 선언한 데는 급속한 우리 사회의 변화상과 세계적 흐름이 크게 작용했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1953년 혼인빙자간음죄가 포함된 형법이 제정될 당시만 해도 여성의 성적 순결이 중시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여성계 또한 전반적으로 혼인빙자간음죄의 필요성에 공감했다.

그러나 반세기가 지나는 동안 성에 대한 개방적 인식이 확산하면서 정조를 중요시하는 사회 분위기가 약화했고, 오히려 여성만을 보호 대상으로 보고 남성만 처벌하는 것이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의 산물이라는 인식이 서서히 싹텄다.

여성계를 중심으로 점차 혼인빙자간음죄를 폐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고 급기야 이번 심판 사건에서 여성부가 같은 정부 부처인 법무부의 존치 의견에 맞서 피해자를 여성으로 한정한 것은 여성 비하로 이어질 수 있다며 폐지 의견을 내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보호 대상인 여성 스스로 혼인빙자간음죄를 보호의 외양을 갖춘 차별 도구라고 주장하는 상황에서 헌재 재판관들 또한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반세기 만에 형법 개정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혼인빙자간음죄 조항이 삭제될 가능성이 크게 점쳐진다는 점도 이번 헌재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도 나온다.

법학계의 대표적 인사들로 구성된 형법개정연구회는 형법 개정을 앞두고 최근 마련한 시안에서 "혼인 여부는 여성 또한 자유롭게 결정하고 책임져야 할 문제여서 형법이 개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혼인빙자간음 조항을 삭제한 바 있다.

법무부는 이를 참고해 형법 최종 개정안을 마련해 내년 가을 국회에 제출할 계획이어서 혼인빙자간음죄 폐지가 초읽기에 들어간 게 아니냐는 전망이 나온 터다.

혼인빙자간음 조항이 실제 적용돼 형사처벌에 이르는 경우도 급격히 줄어들어 사실상 사문화되고 있다는 점 또한 위헌 판단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대법원에 따르면 작년 혼인빙자간음으로 기소된 사람은 25명, 이 중 실형을 선고받은 사람은 8명에 불과하다.

이밖에 혼인빙자간음을 처벌하는 나라가 세계적으로 드물다는 것도 헌재 결정의 한 이유가 됐다.

혼인빙자간음죄는 엣 서독 형법의 `사기 간음죄'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세계적으로 미국의 일부 주, 루마니아, 터키 정도에서만 비슷한 조항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학계에서는 1953년 우리나라가 형법을 제정할 당시 일본이 도입을 검토하던 제도를 그대로 포함시켰다는 것이 정설이다.

형법상 혼인빙자간음죄가 폐지되더라도 피해자들이 민사소송 절차를 통해 구제받는 것은 여전히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서울중앙지법의 한 판사는 "민법상의 불법 행위는 특정한 경우로 제한되는 것이 아니고 형법상 정해놓은 것보다 범위가 넓어 성관계에 이르게 된 경위가 명백한 기망으로 인정된다면 위자료를 받아 금전적으로나마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연합뉴스) 차대운 기자 setuzi@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