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과장 & 李대리] 날라리 김대리가 야근을? 뺀질이 박과장이 7시 출근을?
중견기업에 다니는 김모 과장(33)은 사내커플이다. 그는 마케팅팀에,남편은 재경팀에 근무하고 있다. 지난 8월 김 과장이 임신하자 남편은 "임신 초기엔 몸 조심이 최고"라며 휴직을 권했다. 김 과장은 직장 친구들로부터 "남편 참 잘 뒀다"는 시샘을 받았다. 휴직 중인 김 과장은 최근 남편으로부터 복직을 종용받고 있다. "연말 인사고과 시즌이 가까워지는 만큼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김 과장,이 대리들에겐 연말 인사고과는 피할 수 없는 관문이다. 차장 및 부장 승진 등 갈 길이 먼 이들에게 인사고과 스펙을 관리하는 것은 '직장생활 연장'의 필수 조건이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 몇 년 새 인사고과 결과에 따라 연말 성과급이 달라지면서 인사고과의 중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연말이면 '모범생'으로 변신

이동통신회사에 근무하는 정모 과장(36)은 요즘 인사고과 시즌이 다가왔음을 몸으로 느끼고 있다. 평소 '칼 출근'과 '칼 퇴근'을 생활신조로 삼던 부서 동료들의 출퇴근 시간이 변했기 때문이다. 출근시간은 갈수록 빨라진다. 딱히 할 일이 없어도 밤 늦게까지 자리를 지키는 동료도 많다. 정 과장은 "인사고과의 기본 잣대가 되는 개인별 연간 목표치는 대부분 달성하기 때문에 '플러스 알파'가 필요하다"며 "이를 위해선 근무태도를 가다듬는 건 기본"이라고 말했다.

중견기업 임원 비서실에서 근무하는 이모 대리(28 · 여)는 "평소 임원에게 이메일이나 전화로 보고하던 직원들조차 최근엔 직접 찾아가 한 시간도 더 기다렸다가 구두보고를 하고 돌아간다"며 "인사고과 시즌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전했다. 한 번이라도 더 '눈도장'을 찍으면 아무래도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지 않겠느냐는 기대감에서 벌어지는 풍경이다.

◆보고서 '품질'보다는 '납기일' 준수를

제약회사의 허모 과장(36)은 입사 동기보다 승진이 1년 반이나 빠르다. 평범한 대학 출신에,어눌한 언변,느릿한 발표력 등으로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 하지만 매년 인사고과에서 최고점을 받아 동료들을 놀라게 한다.

그가 최고점을 받을 수 있는 비결은 평소 근무태도.그는 "성실함을 증명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효과는 술 마신 다음날 일찍 출근하는 것"이라고 귀띔했다. 대부분 직원의 실력과 실적이 고만고만하다 보니 사소한 근무태도의 차이가 인사고과를 좌우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인사평가자는 평소 직원들의 이미지를 내장하고 있다가,자신도 모르게 '플러스 알파'를 더 얹어주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업무 보고서도 마찬가지다. 허 과장의 보고서 만드는 능력은 중상급 정도다. 하지만 매번 인사고과에서 A급을 받는 건 그가 거의 유일하다. 각종 보고거리가 있으면 '질'보다는 '납기일'을 준수하는 것이 그의 철칙이다. 그는 "경천동지할 만한 보고서가 아니라면 완성도가 약간 떨어지더라도 정해진 기간 내에 보고하는 것이 후한 점수를 받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조언했다.

◆목소리 큰 사람이 장땡(?)

외국계 제약회사의 강모 대리(30)는 얼마 전 동료 때문에 인사고과에서 낙제점인 C등급을 받아야 했다. 별로 일도 잘하지 못하는 동료는 어느 날 술자리에서 '사표를 쓰겠다'고 난리를 피웠다. 마음이 약해진 팀장은 회유책으로 동료에게 A등급을 줬다. 강 대리 회사의 인사고과는 상대평가로 이뤄진다. 누군가 높은 점수를 받으면 누군가는 나쁜 점수를 받아야 한다. 강 대리가 그 희생양이 된 것.강 대리는 "그만두겠다던 동료는 6개월 동안 편히 다니다가 결국 사표를 냈다"며 "목소리 작은 나만 바보가 됐다"고 불만을 털어놨다.

불만이 있더라도 딱히 이를 전달할 경로가 없는 게 인사고과 시스템의 한계다. 물론 피드백 과정에서 이의를 제기할 수 있지만 그런 용기를 가진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막상 이의를 제기하더라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상사의 말을 정면으로 반박하기도 힘들다. 업무성과가 숫자로 입증되지 않는 정성(定性) 평가의 경우 더욱 그렇다. 강 대리는 "동료가 동료를,부하가 상사를 평가하는 입체평가 시대가 와야 한다는 의견이 상당하다"고 전했다.

◆동료에 대한 비판은 금물

다면평가를 도입한 기업에서는 김 과장,이 대리들의 '처세 방정식'이 보다 복잡해진다. 직장 상사뿐만 아니라 관련 부서 동료 및 선후배들로부터도 평가를 받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국내 한 중견 소비재 기업 마케팅팀은 인사고가 시즌만 되면 회의 풍경이 달라진다. 평소 이 부서 회의는 각자가 낸 아이디어에 대한 치열한 토론을 거쳐 결론을 도출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경우에 따라 '끝장토론'이 벌어질 정도로 분위기가 달아오른다.

그러나 인사고과 시즌이 되면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에 대해 반박하지 않는 것이 일종의 관행처럼 돼 있다. 이 회사 왕모 대리(33)는 "혼자 튀려고 다른 사람 아이디어를 비판했다가는 자칫 왕따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중견기업에 다니는 오모 과장(40)은 매년 '후배 챙기기'로 승부수를 띄운다. 오 과장의 회사도 다면평가를 실시한다. 상사 못지 않게 후배들의 평가점수도 중요하다. 오 과장은 점심시간 식당이나 퇴근 후 호프집에서 우연히 만나는 후배들의 밥값 및 술값을 대신 내주곤 한다. 당구장에서 만나는 후배들의 게임비도 지갑이 허락하는 한 계산해주려 애쓴다. 최근엔 아끼던 골프채도 직속 후배에게 넘겼다. 이렇게 하나둘씩 쌓아둔 인덕이 자신의 인사고과 평가에 영향을 미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연말효과' 겨냥해 실적 아껴두기

해마다 방송사 연기대상이나 가요대상 시상식을 보면 한 가지 '공식'이 있다. 시상식이 열리는 연말과 가까운 기간에 '빅히트'를 친 연예인들일수록 상받을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인사고과도 마찬가지다. 인사고과를 앞두고 '한건'을 올리면 효과는 배가 될 수 있다.

국내 대형 증권회사 지점에서 근무하는 민모 과장(38)은 작년 한 해 실적 부진으로 마음고생이 심했다. 특히 연말이 다가오면서 "이러다가 올해 인사고과에서 최하점을 받는 게 아닌가"하는 불안감에 안절부절하지 못했다. 그때 업계에서 손꼽힐 만한 펀드매니저한테서 "계좌 만들러 오라"는 전화를 받았다.

1년 동안 매일 찾아가고,리서치 자료 갖다주고,술도 같이 마시고 하면서 공들인 게 '9회말 역전 만루홈런'으로 결실을 맺은 것이다. 덕분에 민 과장은 올초 승진에 성공했다. 그는 "일부 동료들은 자신이 조절 가능한 계약이면 가급적 연말에 터뜨리기 위해 아껴두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전했다.

대기업 계열 상사에 다니는 유모 과장(37)은 평소 떠오른 각종 신사업 관련 아이디어를 가급적 연말에 쏟아낸다. 그는 "다음해 사업 계획을 세우는 연말에 똘똘한 아이디어를 내면 좋은 인사고과를 받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김동윤/이관우/이정호/정인설/이고운 기자 oasis93@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