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층 행적 상세기술…친일 독립유공자도
일부 인사 엽기적 친일행각도 드러나

8일 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한 친일인명사전에는 일제 식민통치와 전쟁에 협력한 인물 4천389명의 주요 친일 행각과 해방 이후 행적 등을 인물, 이름, 가나다 순으로 소개한다.

특히 박정희 전 대통령을 비롯한 지도층 인사와 문화예술계 유력 인사들의 이름이 상당수 사전에 올랐고, 독립유공자로 지정돼 있던 인물들도 들어있어 파장이 적지않을 전망이다.

◇ 사회 지도층 대거 포함 = 사전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을 비롯해 김성수 전 부통령, 장면 전 국무총리 등 지도층 인사들의 친일 행적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박 전 대통령에 대해 사전은 만주국 군관으로 지원할 당시의 상황을 상세히 설명한 1939년 3월31일자 `만주신문'을 인용하고 있다.

이 기사는 박 전 대통령에 대해 "문경에서 교사로 재직중 만주국의 군관으로 지원하였으나 연령 초과로 일차 탈락하였다.

1939년 재차 응모하며 `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함 박정희)라는 혈서와 채용을 호소하는 편지를 지원서류와 함께 제출했다"고 기술했다.

사전은 또 박 전 대통령이 1942년에는 일본 육군사관학교 본과 3학년에 편입했으며, 1944년에는 만주국군 소속 보병 제8단으로 배속돼 일본군과 합동으로 팔로군을 공격할 때 소대장으로 작전에 참가했다고 소개했다.

장면 전 국무총리도 국민총력천주교경성교구연맹 이사직을 맡았던 경력 때문에 사전에 이름을 올렸다.

이 연맹은 매월 첫째 주를 애국주일로 정해 `무운장구기원미사제'를 지냈으며 미사 후에는 시국에 대한 강론을 갖고 미사 후 단체로 신궁 또는 신사참배를 갖도록 했다고 사전은 설명했다.

현상윤 고려대 초대 총장도 1942년 `춘추' 11월호에 "정신에 있어서는 국체명징과 내선일체를 토대로 황국신민 양성에 힘을 다한다"는 글을 기고하고 1942년 12월6일자 매일신보 인터뷰에서 `황국신민화' 교육을 위한 `의무교육' 실시를 역설해 사전에 수록됐다.

◇ `독립 유공자'들 친일행적도 = 사전에는 김성수 전 부통령을 비롯해 이종욱 전 의원, 언론인 장지연 등 독립유공자로 선정된 인물들도 이름을 올려 눈길을 끌었다.

김 전 부통령은 1943년 8월5일 매일신보에 `문약의 고질을 버리고 상무기풍을 조장하라'는 내용의 징병 격려문을 기고했으며, 같은해 11월6일에는 `대의에 죽을 때 황민됨의 책무는 크다'라는 글을 실어 "대동아 성전에 대해 제군과 반도 동포가 가지고 있는 의무를 위해 목숨을 바치라"고 독려했다고 사전은 기술했다.

또 같은해 12월10일에는 `학병을 보내는 은사의 염원'을 밝히며 징병검사에 나설 것을 촉구하기도 하고, 같은달 17일 보성전문학교의 학도지원병 예비군사학교 입소식에서는 "황군의 일원의 광영을 입게 됐으니 학도의 기분을 버리고 군인의 마음으로 규율있는 생활을 하라"고 훈시했다고 돼 있다.

`시일야 방성대곡'으로 유명한 언론인 장지연도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은 독립투사로 알려졌으나, 사전에서는 그의 친일 성향 글을 공개하며 친일 인사로 규정하고 있다.

사전에 따르면 장지연은 1914년부터 1918년까지 4년여 동안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한시를 포함해 약 700여편의 글을 실었다.

특히 1916년 12월10일에는 2대 총독으로 부임하는 하세가와 요시미치를 환영하는 한시를 매일신보에 싣기도 했다.

조계종 총무원장과 2대 국회의원을 지낸 이종욱 전 의원도 1977년 건국훈장이 추서됐으나 일제시절 총본산 암사에 창씨개명 상담소를 설치하고 1941년에는 "일본군의 무운장구를 기원하라"는 통첩을 전국 사찰에 보낸 사료가 발견돼 친일 인사로 규정됐다.

◇ 문화ㆍ예술인도 다수 등장 = 음악가 안익태, 홍난파와 무용가 최승희, 소설가 김동인과 시인 서정주 등 일제시절 활동한 여러 문화ㆍ예술인이 수록돼 학계의 논란도 뜨거워질 전망이다.

안익태는 1938년 `관현악을 위한 환상곡-에텐라쿠'를 발표했는데, 이는 본래 일본 천왕 즉위식 때 축하작품으로 사용되던 일본의 관현악 `에텐라쿠'를 그대로 차용한 작품으로, 안익태는 이를 1939년 로마방송오케스트라 연주회, 1940년 불가리아 소피아 연주회 등에서 직접 지휘하기도 했다고 사전은 설명한다.

또 1942년에는 만주국 건국 10주년을 경축하는 의미로 `만주환상곡'을 작곡해 기념음악회에서 지휘하기도 했다.

홍난파는 1937년 6월을 전후해 일제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협력하는 내용의 가요를 작곡하고 11월 4일에는 `사상전향에 관한 논문'을 발표해 "민족운동을 표방하는 단체에 가맹한 적인 있는 필자는 후회가 막급할 뿐 아니라 부끄러움을 금할 수가 없다. 금후 일본제국 신민으로서 본분을 다하겠다"는 글을 썼다고 사전은 설명했다.

현대무용가 최승희는 1942년 2월 `최승희 무용공연'을 개최하면서 "우리 무적 황군은 싱가포르를 공략 성공하고 있는 이때 저는 무용으로 그 기쁨을 축하하게 된 것으로 참으로 광영으로 생각합니다"라는 소감을 밝힌 것으로 조사됐다.

사전은 또 그가 1937년부터 1944년까지 무용공연 수익 중 7만5천원이 넘는 금액을 국방헌금ㆍ황군 위문금 등으로 헌납한 것으로 조사됐으며, 해방 후 중국에서 인천으로 건너왔으나 친일행적이 문제가 돼 월북했다고 기술했다.

김동인은 조선총독부 외곽단체인 조선문인협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1941년 7월24일부터 `매일신보'에 의자왕이 항복하자 일본이 구원하러 온다는 내용의 `백마강'을 연재한 행적이 수록됐다.

서정주는 사전에서 `매일신보'에 `헌시-반도학도 특별지원병 제군에게'라는 제목의 시를 발표해 "교복과 교모를 이냥 벗어버리고 주어진 총칼을 손에 잡으라"고 썼으며, 1943년 수필 `스무살 된 벗에게'에서는 "젊은 사람들은 일본제국 군인으로서의 자기를 단련해 나갈 것"이라고 쓴 것으로 소개됐다.

◇ 노골적인 친일행각 인사들 = 일반인의 생각을 훨씬 뛰어넘는 적극적인 친일 행각을 벌인 사례들도 다수 소개돼 충격을 주고 있다.

독립운동가였던 김동한은 1925년부터 친일인사로 전향해 1934년에는 항일세력 파괴와 민간인 통제를 위한 특수공작대를 설립, 항일부대원을 살해ㆍ체포하는 일에 나섰다. 그는 1937년 항일군과 교전 중 사망했고 일본은 야스쿠니 신사에 그의 위패를 안치했다.

조선총독부에서 순사로 근무하던 김덕기 역시 독립운동가를 체포하는 등의 활동에서 두각을 드러내 조선총독이 주는 경찰 최고 훈장인 `경찰관리 공로기장'을 받았다고 돼 있다.

평안남도 관찰도 안주지방위원을 맡았던 김인오는 사망 직전에 일제의 비행기 구입비로 5만원을 헌납하라는 유서를 남기기도 했고, 항일 부대원 50여명을 사살한 것으로 조사된 일본군 중좌 김인욱도 사전에 이름을 올렸다.

또 740여명 중 절반 이상이 조선인으로 구성된 만주국군 간도특설대는 1938년 항일무장세력 및 민간인 172명을 살해해 악명을 떨친 것으로 조사됐다고 사전은 소개했다.

(서울연합뉴스) 임형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