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 뒷조사에 악용…심부름센터도 연루된 듯

올해 봄 서울 용산 전자상가의 한 이동통신사 대리점.

인근 상가의 휴대전화 판매업자인 김모(35)씨가 찾아와 대리점 직원에게 불쑥 40대 여성의 이름과 주민등록번호가 적힌 종이를 건네면서 "고객 부탁으로 왔는데, 이 여성의 유심(USIMㆍ3세대 휴대전화의 범용가입자식별모듈) 명의를 내가 가져 온 이 유심으로 옮겨 달라"고 요청했다.

유심은 이통사 가입자의 신원과 전화번호 등 정보가 담긴 소형 칩으로 단말기에 꽂으면 해당 개인의 전화기로 바로 쓸 수 있다.

이 때문에 가입자의 유심을 다른 유심으로 바꾸는 것은 원칙적으로 당사자 확인을 받아야 하는데도 상가에서 낯이 익은 `사장님'의 말에 대리점측은 별다른 의심 없이 이 여성의 주민등록번호로 유심 정보를 검색해 명의를 옮겨 줬다.

이런 식으로 명의가 바뀐 유심은 불법감청 범죄에 악용됐다.

문자 무단열람 알선 서비스를 제공한 일당 중 `기술담당'인 김씨는 명의가 옮겨진 유심을 준비한 단말기에 탑재해 피해자 명의의 '복제폰'을 만들고서 거짓 본인 인증을 받아 문자매니저 계정을 만들어 이를 같은 일당 양모(31)ㆍ이모(43)씨를 거쳐 감청 브로커 등에 넘겼다.

복제폰을 만든 것이 들통나지 않도록 가능한 한 신속하게 계정을 만들고서 10∼20분 내로 유심 교체를 취소해 원상태로 돌려놓는 치밀함도 보였다.

유심 명의가 바뀌면 원래 주인의 휴대전화가 통화 불능 상태가 되는 것을 알고 30분 만에 계정을 확보하고 명의 이동을 도로 취소해 피해자가 `잠시 기기 장애가 일어났을 뿐'이라며 안심하게 만드는 수법을 쓴 것이다.

김씨가 여러 차례 유심 명의 이전과 취소를 거듭했지만 대리점 직원들은 `잘 아는 업자'란 이유만으로 이를 수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게 화를 키웠다.

유심 정보 관리에 소홀했던 이통사 대리점 측의 도덕적 해이가 범죄를 부추긴 셈이다.

김씨 일당은 배우자나 애인의 외도를 의심하며 고민하던 40∼50대의 평범한 남성들에게 접근해 불법 감청을 하도록 꼬드겼다.

한 45세 회사원은 아내가 집에 늦게 들어오고 몰래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일이 많아지자 술집에서 푸념을 늘어놓다가 주변에서 이 말을 듣고 슬그머니 다가온 브로커의 꾐에 넘어가 200만원을 주고 아내 명의를 도용한 문자매니저 계정의 아이디와 암호를 받았다.

다른 고객인 57세 건축업자는 애인이 바람을 피운다며 서울 종로 세운상가에서 도청 장비를 찾던 중 갑자기 한 남자가 '더 효과적인 뒷조사 방법이 있다'고 접근하자, 50만원을 주고 애인 명의의 문자매니저 계정을 얻었다.

이들은 불법인 줄 알았지만, 남녀관계에 대한 의심이 계속되자 유혹을 떨쳐 버릴 수 없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이통사 대리점의 관리 부실과 연인에 대한 과도한 사랑, 브로커들의 배금주의 등이 맞물려 엄격히 보호받아야 할 문자통신이 벌거숭이 상태로 노출된 것이다.

브로커들은 신원을 밝히지 않고 현금이나 대포통장(다른 사람 명의의 통장)으로 거래를 해 역추적이 쉽지 않은 편이다.

하지만, 경찰은 구속된 일당의 진술을 토대로 뒷조사를 하는 심부름센터(흥신소)도 이번 범죄에 대거 개입한 것으로 보고 이 부분을 조사하고 있어 3세대 휴대전화를 활용한 신종범죄의 전모가 밝혀질지 주목된다.

(서울연합뉴스) 김태균 기자 tae@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