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로 의약품은 정교한 과학적 이론을 바탕으로 후보물질 발굴단계에서부터 '치밀한 설계'에 따라 개발된다. 일관된 효능을 지속적으로 발휘하면서도 인체에 해를 끼치지 않아야 하는 약의 본질을 충실히 지켜내기 위해서다. 나노기술 등 첨단과학이 모두 동원되는 것이 이 때문이다. 하지만 일부 치료제들은 그야말로 우연한 기회에 발견되기도 한다. 이른바 '럭키드럭'(lucky drug)이란 별칭을 달고 다니는 의약품이 적지 않은 배경이다.

1999년 발매된 간염바이러스 치료제 '제픽스'(라미부딘)가 그 중 하나다. 이 약품은 원래 에이즈치료제로 연구됐다. 그러나 중간에 B형 간염바이러스의 증식을 억제하는 효능이 발견되면서 주전공을 바꿨다. 계절독감 치료제인 리렌자도 원래는 에이즈를 연구하다 우연히 개발된 약물.뿐만 아니라 대머리 치료제 '프로페시아'나 발기부전 치료제 '비아그라' 등도 당뇨병이나 심혈관계 질환 치료제를 연구하다 우연히 개발돼 대박을 친 의약품들이다. 이 같은 우연함은 업계에서 오랜 노력 뒤에 주어지는 일종의 '보너스' 같은 성격으로 받아들여지는 게 일반적이다. 노력 없이는 운도 따르지 않는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대목이다. 아쉽게도 지금까지 국내에서는 이 같은 사례는 드물었다.

하지만 최근 LG생명과학(대표 김인철)이 이처럼 우연한 과정에서 발견한 물질이 간질환을 비롯해 장기이식에까지 다양한 분야에 활용될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했다고 발표해 관심을 모으고 있다.

주인공은 '사이토프로'라는 세포보호물질.회사에 따르면,사이토프로는 기존의 면역억제제나 항산화제 등의 일반 세포보호물질에 비해 세포 괴사 (Necrosis) 억제 효과가 수십배 이상 획기적으로 뛰어나다. 이를 활용하면 혁신형 신약, 세포치료, 전문시약, 피부미용 등 다양한 제품들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 회사 측 설명이다. 특히 현재 문헌에 보고되어 있는 다른 세포보호 물질과는 달리 독소나 스트레스로 인한 세포 사멸의 억제 효과, 세포 생존능력의 증대 효과 및 항산화, 항염증 효과를 동시에 지닌 혁신적인 물질이라는 것.

또한 뇌혈관 장벽(Blood Brain Barrier) 투과가 가능하고 물에 잘녹는 등 물성이 좋아 대량 합성이 가능한 장점이 있어 신약개발이 편리하다고 회사 측은 강조했다. 이에 따라 간질환 (간절제술, 간이식, 간경화),퇴행성 뇌질환 (루게릭 등) 및 허혈성 질환 (심근경색, 뇌졸중)에 유용한 혁신적인 신약 개발은 물론 각종 세포 배양액 (세포 치료, 진단검체 보존제, 피부미용 등)과 조직공학 (인공장기, 장기 보존 등) 등 다양한 분야로의 개발이 가능하다는 것이 회사 측 설명이다. 가능한 응용분야가 워낙 다양하다 보니 경제적 가치추산도 쉽지 않다. 김인철 LG생명과학 대표는 이와 관련,"우리 스스로도 이 물질(사이토프로)의 가치를 가늠하기가 어렵다"고 말했을 정도다.

뇌세포, 췌장세포, 심장세포 및 간세포 등 다양한 세포에서 효과적인 세포 괴사 억제 효과를 나타내며, 세포이식시 생존률을 증대시키는 '슈퍼 세포보호제' 탄생의 계기가 우연한 실험결과를 그냥 버리지 않은 꼼꼼함에서 비롯됐다. 회사 관계자는 "원래 당뇨병 치료제 개발을 위한 독성테스트 과정에서 발견한 물질이 사이트프로의 토대가 됐다"며 "강한 독성을 지닐 것으로 예상했던 물질이 오히려 장기조직의 세포를 보호해준 것으로 나타나 본격적인 연구에 착수하게 됐다"고 말했다.

동물실험을 주도했던 아산병원 박광민 교수는 "LG생명과학이 개발한 세포보호물질이 허혈성 재관류 간손상을 효과적으로 억제함을 개시험에서 확인했다"며 "발견 자체에는 행운이 뒤따랐지만 추가연구를 통해 앞으로 더욱 큰 결실로 이어지길 기대하고 있다"고 밝혔다.

LG생명과학은 단기적으로 전문시약, 진단검체 괴사방지, 피부미용 등 관련 분야로 내년 세계 첫 상용화에 나서고, 중장기 개발과제로 희귀질환이나 절제술, 색전술 및 장기 이식에 대한 임상도 실시할 계획이다.

김인철 LG생명과학 사장은 "이번에 개발에 성공한 혁신적 세포보호제는 향후 인체는 물론 다양한 분야로의 접근성이 용이해 타 업종과의 융합을 통한 사업기회 확대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며 "여러 분야에서 고객들에게 새로운 가치를 제공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이관우 기자 leebro2@hankyung.com